[스크랩] 허균
허균 (조선 학자․문인) [許筠]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학자․문인․정치가.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수(惺叟-늙은이 수). 그의 가문은 대대로 학문에 뛰어난 집안이어서 아버지 엽(曄), 두 형인 성(筬)과 봉(篈-대나무봉), 그리고 누이인 난설헌(蘭雪軒) 등이 모두 시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2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26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삼척부사․공주목사 등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반대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후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뽑혀 중국에 가서 문명을 날리는 한편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때 당대의 실력자였던 이이첨과 결탁하여 폐모론을 주장하면서 왕의 신임을 받아 예조참의․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나, 국가의 변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역적으로 형을 당한 까닭에 그의 저작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성수시화 惺叟詩話〉․〈학산초담 鶴山樵談〉․〈성소부부고 惺所覆藁〉 등 일부만이 남아 전한다. 그는 학론(學論)․정론(政論)․유재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문인으로서 그는 소설작품․한시․문학비평 등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문집에 실려 있는 그의 한시는 많지는 않지만 국내외로부터 품격이 높고 시어가 정교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화(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문학비평은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홍길동전〉은 그의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적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새로운 세계의 건설 등을 제안했다. 〈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장생전〉․〈남궁선생전〉 등은 그가 지은 한문소설인데, 여기서는 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의미 있게 살아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남다른 삶의 모습과 사상을 기술했다.
老客婦怨 노객부원 늙은 나그네 아낙의 원망
許筠 허균 1569~1618
東州城西寒日훈 동주성서한일훈 동주성 서쪽, 차가운 해 뉘엿뉘엿
寶蓋山高帶夕雲 보개산고대석운 우뚝한 보개산이 저녁 구름 감싸 있다
파然老의衣藍縷 파연로구의남루 머리 허옇게 센 늙은 할미, 남루한 옷차림
迎客出屋開柴戶 영객출옥개시호 손님 맞아 방을 나와 사립문을 열어준다
훈
自言京城老客婦 자언경성로객부 스스로 말하기를, 서울 늙은 나그네 아낙
流離破産依客土 류리파산의객토 파산하여 떠돌다가 객지에 사는 신세가 되었다오
頃者倭奴陷洛陽 경자왜노함락양 저 지난날 왜놈들이 서울을 함락시켜
提携一子隨姑郞 제휴일자수고랑 외 아들 손에 잡고 시어머니와 남편 따라
重跡百舍竄窮谷 중적백사찬궁곡 삼백리 길 걷고 걸어 깊은 골에 숨어왔소
夜出求食晝潛伏 야출구식주잠복 밤에 나와 밥을 빌고 낮에는 숨어 살았소
姑老得病郞負行 고로득병랑부행 시모 늙어 병을 얻어 남편이 업고 가니
蹠穿쟁山不遑息 척천쟁산불황식 험한 산길에 발바닥이 다 뚫어져도 쉴지도 못했소
쟁
是時天雨夜深黑 시시천우야심흑 이런 때, 비는 내려 밤이 더욱 캄캄하니
坑滑足酸顚不測 갱활족산전불측 길 미끄럽고 다리 시러워 언제 넘어질지 몰랐소
揮刀二賊從何來 휘도이적종하래 칼 휘두르는 두 왜적은 어디서 왔는지
闖暗섭종如相猜 틈암섭종여상시 어둠 속에 머리 내밀며 서로 다투어 뒤를 밟아
섭종
怒刃劈두두四裂 노인벽두두사렬 성난 칼날 목을 갈라서 목이 찢어졌소이다
子母倂命流원血 자모병명류원혈 어미와 아들 다 죽어 원한의 피 흐르고
我설幼兒伏林藪 아설유아복림수 나는 어린아이를 끌고 덤불 속에 엎드렸소
兒啼賊覺驅將去 아제적각구장거 아이 울음에 들켜 잡혀가고 말았으니
只餘一身脫虎口 지여일신탈호구 내 한 몸 겨우 남아 호랑이 굴을 벗어났지만
蒼黃不敢高聲語 창황불감고성어 허둥지둥 경황없어 소리 높여 말조차 못했소
明朝來視二骸遺 명조래시이해유 다음 날 아침 와서 보니 두 시체 버려져
不辨姑屍與郞屍 불변고시여랑시 시모인지 남편인지 분간할 길 없었다오
烏鳶啄腸狗교격 오연탁장구교격 솔개와 까마귀 창자 쪼고, 들개는 살 뜯으니
라리欲掩憑伊誰 라리욕엄빙이수 삼태기와 흙수레로 덮어가리려해도 누가 도와주랴
辛勤掘得三尺담 신근굴득삼척담 석 자 깊이 구덩이를 천신만고로 겨우 파서
手拾殘骨閉幽坎 수습잔골폐유감 남은 뼈골 손수 모아 봉토하고 나니
라리
경경隻影終何歸 경경척영종하귀 의지 없는 외그림자 끝내는 어디로 돌아갈까
隣婦哀憐許相依 린부애련허상의 이웃 아낙 슬피 여겨 함께 살자 하여
遂從店裏躬井臼 수종점리궁정구 이 주막에 더부살이 방아 찧고 물 길렀소
궤以殘飯衣弊衣 궤이잔반의폐의 남은 밥 먹여 주고 낡은 옷 입혀 주어
경경 궤
勞筋煎慮十二年 로근전려십이년 지치고 마음졸이기 열두 해가 되었다오
面려髮禿腰脚頑 면려발독요각완 주름진 얼굴, 듬성머리, 허리도 다리도 뻐근한데
近者京城消息傳 근자경성소식전 근자에 서울 소식 드문드문 들려왔소
孤兒賊中幸生還 고아적중행생환 내 불쌍한 아이는 적중에서 다행히도 살아나와
려
投入宮家作蒼頭 투입궁가작창두 대궐에 투숙하여 창두가 되었다 하오
餘帛在사균倉稠 여백재사균창조 옷장에는 남은 비단, 창고에는 곡식 가득하니
娶婦作舍生計足 취부작사생계족 장가들고 집 마련하여 생계가 풍족하다 하나
不念阿孃客他州 불념아양객타주 타관살이 나그네 처지 제 어미께 생각 못하니
사균
生兒成長不得力 생아성장불득력 낳은 아들 성장해도 그 덕을 보지 못하오
念之中宵涕橫臆 념지중소체횡억 생각할수록 한밤중에 눈물이 가슴 적시고
我形已췌兒已壯 아형이췌아이장 내 꼴은 다 시들고 아들은 이미 장년이 되었소
縱使相逢거相識 종사상봉거상식 설사 서로 만나더라도 알아볼 리 있을까
老身溝壑不足言 로신구학불족언 늙은 몸 구렁에 버려지는 건 더 말할 나위 없거니
得汝酒요父墳 안득여주요부분 너의 술이라도 얻어 아비 묘에 올려볼 수 없겠는가
嗚呼何代無亂離 오호하대무란리 아 슬프구나, 어느 시대인들 난리야 없으랴만
未若妾身之抱원 미약첩신지포원 이 못난 여편네가 품은 원한은 아직도 없었으리라
요 원
成佛庵 성불암
許筠 허균 1569■1618
深樹僧房小 심수승방소 울창한 숲에 승방은 작고
層巒石路分 층만석로분 층층 둘러싼 산에 돌길이 나뉘어 있네
中宵初見月 중소초견월 밤이 깊어서야 달을 보았는데
滄海闊無雲 창해활무운 넓은 바다는 활짝 트여 구름 한점 없네
香氣諸天降 향기제천강 향기는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鐘聲下界聞 종성하계문 종소리는 땅에서 들리어오네
冷然人境外 냉연인경외 시원하다, 인간 밖 세상이라
不恨久離群 불한구리군 사람들과 오래 떨어진 것이 한스럽지 않네
摩訶衍 마하연
許筠 허균 1569■1618
寶刹排雲上 보찰배운상 절이 구름을 밀치고 솟아
珠宮奪日鮮 주궁탈일선 집은 햇빛을 받아 곱기도 하다
經函明貝葉 경함명패엽 경전함에는 貝葉鏡이 빛나고
爐燼郁煎檀 노신욱전단 화로에는 전단향이 그윽하다
僧侶參禪坐 승려참선좌 승려는 참선에 들고
吾仍借榻眠 오잉차탑면 나는 걸상을 빌려 잠이 들었다
夜란風뢰發 야란풍뢰발 밤이 이슥해지자 바람소리 들리고
笙鶴下三天 생학하삼천 신선의 학이 세상으로 내려오네
移小桃用惜落花韻 이소도용석낙화운
앵두나무 옮겨심다 떨어지는 꽃을 아쉬워하며
許筠 허균
淺植幽厓奈爾何 천식유애내이하 그윽한 언덕 살포시 묻힌 네 신세를 어이할까
孤根無路近陽和 고근무로근양화 외로운 뿌리는 따뜻한 빛을 가까이 할 길이 없구나
移栽隙地勤封護 이재극지근봉호 틈새 땅에 옮겨 심어 부지런히 북돋아주니
爲待朱明結子多 위대주명결자다 여름철을 기다려 열매 많이 맺기 위함이라오
두관참(頭關站)-허균(許筠)
두관참에서-허균(許筠)
川流漭沆野蒼茫(천류망항야창망) : 漭 넓을 망
냇물은 넘실거리고 벌판은 아득한데
古戌悲笳斷客腸(고술비가단객장) : 笳 길잎피리가
옛 수자리 슬픈 피리 나그네 간장을 끊는다
始覺塞城秋候早(시각새성추후조) :
변방의 가을철은 이렇게도 빠른가
夜深蛩韻已依床(야심공운이의상) : 蛩 메뚜기 공, 귀뜨라미
밤 깊으니 뀌뚜라미 소리 침상에 들려온다
강성자(江城子)-허균(許筠)
강가의 성
綉窓春怯五更風(수창춘겁오경풍) : 綉 수놓을 수, 솜 한조각
비단 창가에 봄 날씨, 오경 바람 두려워
錦屛中燭花紅(금병중촉화홍) :
둘러친 병풍 속에 촛불 붉어라.
夢罷西廂(몽파서상) :
서상에서 잠을 깨니
微雨暗房櫳(미우암방롱) : 櫳 우리 농, 창살이있는 창
보슬비에 창문 어두워진다.
望斷瀛洲人不見(망단영주인불견) :
저 멀리 영주를 바라보니 그 사람 보이지 않고
多少恨泣芙蓉(다소한읍부용) :
한 많아 눈물짓는 부용이여.
滄溟天闊碧煙籠(창명천활벽연롱) :
푸른 바다 넓은 하늘에 푸른 연기 끼어있고
聚眉峯向瑤空(취미봉향요공) :
취미봉은 맑은 하늘 향했어라.
遙想雪波(요상설파) :
저 멀리 생각하니 눈같이 하얀 파도
應與鏡湖通(응여경호통) :
응당 맑은 호수와 서로 통할 것이니라.
寄我思君千點流淚(기아사군천점류루) :
임 그리는 천 방울 눈물 부쳐줄까 하여도
不到草堂東(부도초당동) :
그대 초당 동쪽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옹래(懶翁來)-허균(許筠)
나옹이 찾아오다
客逐東風至(객축동풍지) : 손님이 봄바람 따라 오니
令余病欲蘇(령여병욕소) : 나의 묵은 병이 갑자기 낫는 듯
能爲謝尙舞(능위사상무) : 사상의 춤가락 을 능히 추니
自是高陽徒(자시고양도) : 본시부터 고양의 무리가 아닌가
事業餘椽筆(사업여연필) : 사업은 서까래 같은 붓이 남았고
生涯付玉壺(생애부옥호) : 생애는 옥술병에 맡겨 버렸도다
微官亦何物(미관역하물) : 하찮은 벼슬아치 또 그게 무엇인가
歸路在江湖(귀로재강호) : 돌아갈 길은 저 강호에 있도다
壺 병호, 병, 투호
재군석작(在郡夕作)-허균(許筠)
고을에 머물며 저녁에 짓다
靑煙一抹起官庖(청연일말기관포) : 한 가락 파란 연기 관포에 피어오르고
미卵熊번薦案肴(미란웅번천안효) : 사슴 새끼, 곰 발바닥을 안주로 올렸구나
飽飯不容公事了(포반불용공사료) : 배불리 먹고 공사에는 등한하다니
詩人應有素餐嘲(시인응유소찬조) : 시인은 응당 소찬을 조롱할 것이로다
庖 부주간 포, 부엌, 麛 사슴새끼미 蹯 짐승바닥 번
麛
숙서흥인가(宿瑞興人家)-허균(許筠)
서흥인가에 묵으며
甌笋捧纖纖(구순봉섬섬) : 사발에 담은 죽순 손수 받들고
龍團渴更添(룡단갈경첨) : 용단이 말라가니 다시 더보탠다
天寒風捲幙(천한풍권막) : 날이 차니 바람은 장막을 걷고
夜久月窺簷(야구월규첨) : 밤이 깊으니 달은 처마를 엿본다
山蹙文君錦(산축문군금) : 탁문군의 비단처럼 주름진 산
香熏賈氏簾(향훈가씨렴) : 가의씨의 주렴처럼 향기 진하구나
蓬山一千里(봉산일천리) : 봉산은 천리 밖에 있어
歸夢曉염염(귀몽효염염) : 새벽마다 꿈 속에 실컷 돌아간다
甌 사발구, 악기, 笋=荀 풀이름 순, 幙=幕막막 簷처마이름 첨
懕 편안할 염, 넉넉하다
숙황주(宿黃州)-허균(許筠)
황주에 묵으며
屛蕉隱映背蘭강(병초은영배란강) : 둘러선 파초는 어리 비추며 난강을 등지고
瑟柱初張萬玉총(슬주초장만옥총) : 비파 기둥 갓 고르니, 온갖 옥돌 쟁그렁소리
羔酒滿斟金張暖(고주만짐금장난) : 고량주 잔에 술 부으니 금장이 따뜻해져
任他風雪撲寒窓(임타풍설박한창) : 눈바람은 저 마음대로 창문을 때리는구나
인군무효도해(因軍務曉渡海)-허균(許筠)
군무로 인해 새벽에 바다를 건너며
說劍非能事(설검비능사) : 칼 이야기가 나의 능사가 아닌데
還勞府檄徵(환로부격징) : 도리어 관아의 부름만을 힘들게 했다
侵星航積水(침성항적수) : 불어난 물에 배 저어 별빛에 나가니
驅馬戰層氷(구마전층빙) : 얼음판에 떨면서 말을 몰아 간다
曉月風樓笛(효월풍루적) : 새벽 달빛에 바람부는 누대에 젓대소리
寒天雪舫燈(한천설방등) : 차가운 하늘에 불켜진 배에 눈이 쌓인다
宦遊吾自倦(환유오자권) : 벼슬놀이 나 스스로 지겨워져
世事負聾丞(세사부롱승) : 세상 일로 귀머거리 보좌관을 저버리는구나
시사회도양산작(試士回到楊山作)-허균(許筠)
시험 본 선비가 양산에 이르러
棘撤催歸騎(극철최귀기) : 과장이 걷어지자 돌아갈 길 재촉하여
楊州暫解顔(양주잠해안) : 양주에 이르러서 잠깐 긴장을 풀었다
使君斟綠온(사군짐록온) : 원님은 좋은 술을 권하고
淸樂動雲鬟(청악동운환) : 운환의 기녀들은 맑은 풍악 울린다
挑燭香凝帳(도촉향응장) : 촛불을 돋우니 장막에 향이 어리고
掀簾雪滿山(흔렴설만산) : 주렴이 걷히니 온 산에 눈이 가득하다
歡娛不知竟(환오불지경) : 기쁘고 즐거워 마칠 줄을 모르나니
良夜已闌珊(량야이란산) : 좋은 이 밤에 시간이 이미 다 늦었구나
鬟쪽머리환 掀 치켜들 흔, 闌 가로막을 란
우회4(寓懷4)-허균(許筠)
감회에 부쳐
政豈推高第(정기추고제) : 정사를 어찌 후배에게 미룰까
情還憶故鄕(정환억고향) : 내 심경은 도리어 고향 생각이라
空慙二千石(공참이천석) : 녹봉 이천석이 헛되이 부끄러우니
不逮漢循良(불체한순량) : 한 나라 순량에게 미치지 못하는구나
慙 부끄러울 참
우회3(寓懷3)-허균(許筠)
감회에 부쳐
田畝略抛荒(전무략포황) : 밭이랑은 거의 다 묵혀 황폐하고
人民半死亡(인민반사망) : 백성들은 거의 절반이나 죽었도다
征요仍聚斂(정요잉취렴) : 전쟁과 부역에 각주구검
水旱更蟲蝗(수한경충황) : 물난리 가뭄에 또 충재까지 덮다니
征칠정, 요 사역할 요 蝗 누리황
우회2(寓懷2)-허균(許筠)
감회에 부쳐
漉酒頭巾墊(록주두건점) : 술 거르니 두건은 꺾여지고
趨塵手板斜(추진수판사) : 티끌 속 헤매니 계산이 기우는구나
賢愚俱泯滅(현우구민멸) :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모두가 죽는 법
黃綬豈吾誇(황수기오과) : 누런 벼슬 인끈이 어찌 내 자랑이 되리오
漉 거를 녹, 걸르다 墊 빠질 점, 파다, 땅이 낮다,
판 泯망할 민 , 綬 인끈 수, 豈어찌기
우회1(寓懷1)-허균(許筠)
감회에 부쳐
彭澤公田출(팽택공전출) : 평택령 도연명의 수수밭이고
河陽一縣花(하양일현화) : 하양땅 온 고을이 꽃 세상이로다
歸來君自逸(귀래군자일) : 돌아온 그대는 절로 편한데
拙官爾堪嗟(졸관이감차) : 못난 벼슬아치 너희는 서글퍼한다
秫차조 출, 차조 堪 견딜감, 뛰어나다, 嗟 탄식할 차
청백희구(聽伯姬謳)-허균(許筠)
백희의 노래를 듣고
塞曲聲偏壯(새곡성편장) : 변방의 노랫가락 유달리 장엄하여
胡姬貌更奇(호희모경기) : 오랑캐 젊은 계집 얼굴조차 절묘하다
淸音揚月苦(청음양월고) : 맑은 소리 달빛을 흔들고
逸響度雲遲(일향도운지) : 긴 메아리 느릿느릿 구름을 건너온다
凄絶思君曲(처절사군곡) : 처절하나 임 그리는 곡조
悲涼勸酒詞(비량권주사) : 슬프고 처량하다, 권주가의 가사
留君歌至曙(류군가지서) : 벗님 잡아두려 새벽까지 노래 불러
遮莫斂愁眉(차막렴수미) : 시름겨운 나비 눈썹 막아 거두지 말라
貌 얼굴모 涼 서늘할 량
여경무숙학선당(與景武宿學仙堂)-허균(許筠)
경무와 학선당에서 묵다
故人能命駕(고인능명가) : 친구는 늘 나를 찾아와
仍伴郡齋眠(잉반군재면) : 서로 어울려 고을 관아에 묵었다
寵辱驚今日(총욕경금일) : 총애와 욕됨에 놀란 오늘
悲懽說舊年(비환설구년) : 슬픔과 기쁨의 옛날을 이야기 한다
天長霜雁怨(천장상안원) : 높은 하늘, 서리가 한스러운 기러기
漏盡燭花偏(루진촉화편) : 밤은 깊어가고 촛불 꽃이 지는구나
吏體吾方傲(리체오방오) : 관리의 품위 유지에 오만해지는 나
滄洲憶釣船(창주억조선) : 창강에서 낚싯배를 추억하노라
懽 기뻐할환, 즐겁다 환
도군등화학루(到郡登化鶴樓)-허균(許筠)
군에 도착하여 화학루에 오르다
吏散空庭靜(리산공정정) : 아전이 흩어져 뜰은 비어 고요하고
登樓豁遠情(등루활원정) : 누대에 오르니 가슴 환히 트여온다
四山如拱揖(사산여공읍) : 사방 산은 팔짱끼고 읍을 하는 듯
一水自紆縈(일수자우영) : 한 가닥 강물은 저절로 얽혀 흘러간다
夕鳥迎人語(석조영인어) : 저녁 새는 사람 맞아 이야기 하고
秋花盡意明(추화진의명) : 가을꽃은 제 뜻대로 피어 밝기만 하다
소然多野趣(소연다야취) : 온몸이 홀가분하고, 들판의 멋은 짙어가고
忘却擁雙旌(망각옹쌍정) : 원님을 모시는 두 깃발마저 잊어버렸다
豁 뚤린골 활 紆 굽울 우 縈얽힐영
호정(湖亭)-허균(許筠)
호정
煙嵐交翠蕩湖光(연람교취탕호광) :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細踏秋花入竹房(세답추화입죽방) :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頭白八年重到此(두백팔년중도차) : 머리 센 지 팔 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畵船無意載紅粧(화선무의재홍장) :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지사촌(至沙村)-허균(許筠)
사촌에 이르다
行至沙村忽解顔(행지사촌홀해안) : 걷어 사촌에 이르자 웃음이 나와
蛟山如待主人還(교산여대주인환) : 교산은 주인 돌아오길 기다린 듯 하다
紅亭獨上天連海(홍정독상천련해) : 홍정에 올라보니 하늘에 닿은 바라
我在蓬萊縹緲間(아재봉래표묘간) : 멀고 아득한 사이로 봉래산에 나가 있다
縹옥색 표 緲 아득할 묘
부백송주기(府伯送酒妓)-허균(許筠)
부백이 술집 기녀를 보내다
明府多交誼(명부다교의) : 명부에는 교분의 정이 많아
淸樽映翠鬟(청준영취환) : 취환이 맑은 동술에 어리는구나
還將泛海意(환장범해의) : 바다로 떠갈 마음 있더니
携妓在東山(휴기재동산) : 도리어 기생 데리고 동산에 있구나
鬟 쪽진머리 환 鬟
숙락산사(宿洛山寺)-허균(許筠)
낙산사에서 묵다-허균(許筠)
重尋五峯寺(중심오봉사) : 오봉사를 다시 찾아오니
風景似前年(풍경사전년) : 풍경은 지난해와 다르지 않다
竹逕通秋屐(죽경통추극) : 대숲 길을 오가는 가을 발길
花臺起夕煙(화대기석연) : 화대에 저녁연기 피어오른다.
歡迎羅衆衲(환영라중납) : 여러 스님 열 지어 환영하니
勝踐躡諸天(승천섭제천) : 멋진 발걸음 제천을 밟아간다
已悟無生忍(이오무생인) : 이미 불생불멸의 진리 깨달아
蕭然淨俗緣(소연정속연) : 숙연히 속된 인연 씻어버린다
屐 나막신 극 躡 밟을섭, 밟다, 오르다
도중망락산(道中望洛山)-허균(許筠)
길가다가 낙산을 바라보며
香로散作族雲盤(향로산작족운반) : 향로봉 흩어져서 족운반이 되어 盤 소반반
彩暈長明積翠間(채훈장명적취간) : 푸른 빛 쌓인 새로 채색 구름 뻗혀온다
欲問洛迦禪寺宿(욕문락가선사숙) : 낙산사를 물어 하룻밤 묵으려니
行人遙指五峯山(행인요지오봉산) : 길 가는 사람이 아득히 오봉산을 가리킨다
척성호(척成湖)-허균(許筠) 척
척성호
竝海平湖闊(병해평호활) : 바다에 붙어있어 호수가 트이고
沿流客棹輕(연류객도경) : 흐름 따라 내려가는 배는 빠르다
煙凝暮山紫(연응모산자) : 안개는 서리고, 저문 산은 붉어
霜落夕波淸(상락석파청) : 서리가 내리니 저녁 물결 맑기도 하다
槎路通銀漢(사로통은한) : 뗏목 길이 은하수로 통하고
仙居近玉京(선거근옥경) : 신선 같은 삶이 옥경과 가까웁다
吹笙降王母(취생강왕모) : 피리 부니 서왕모가 내려오니
何許董雙成(하허동쌍성) : 동쌍성은 그 어디 쯤에 있는 것일까
竝 아우를 병 槎 나무를 벨 차
청간정(淸磵亭)-허균(許筠)
청간정-허균(許筠)
楓岳曇無竭(풍악담무갈) : 풍악산에 구름 그치지 않아
金門老歲星(금문로세성) : 금문에는 늙은 세성이 떠있다
相逢雖恨晩(상봉수한만) : 만남이 늦음이 비록 한스러우나
交契自忘形(교계자망형) : 교분이 절로 세상일을 잊는다
暫別緣塵累(잠별연진루) : 잠시 이별은 세속의 누 때문이라
幽期屬暮齡(유기속모령) : 그윽한 기약은 늘그막에 맡긴다
高亭殘午夢(고정잔오몽) : 높은 정자에 한낮의 꿈을 남기고
天外萬峯靑(천외만봉청) : 하늘 밖 갓에 많은 봉우리가 푸르다
백천교(百川橋)-허균(許筠)
백천교-허균(許筠)
飛橋百尺跨林端(비교백척과림단) : 나르는 다리 백천교 수풀 끝을 깔고
九月晴雷殷激湍(구월청뢰은격단) : 구월의 마른 우레 같운 부딪는 물소리
利涉何年誰建閣(리섭하년수건각) : 이섭이라 어느 해 누가 누각을 세웠는나
來游今日我憑欄(래유금일아빙란) : 오늘 여기 노리며 난간에 기대어본다
霜淸巨壑奔流淨(상청거학분류정) : 서리 맑은 큰 골짝에 부딪히는 맑은 물결
風急層巒落木寒(풍급층만락목한) : 바람 급한 층진 산봉우리에 낙엽이 차구나
惆悵壯時題柱志(추창장시제주지) : 서글퍼라 젊었을 때 기둥에 적은 청운의 뜻
半生贏得鬢毛殘(반생영득빈모잔) : 인생 반평생에 얻은 귀밑머리만 얻었구나.
贏 이가남을 영, 남다 鬢 살쩍 빈, 귀밑 惆심심할 추
悵 슬퍼할 창
경고별정생두원잉하산(耕庫別鄭生斗源仍下山)-허균(許筠)
경고에서 정두원과 이별하고 하산하다-허균(許筠)
下山未一日(하산미일일) : 하산한 지 하루가 못 되어도
懷山如隔年(회산여격년) : 한 해나 지난 듯이 산이 그리워라
擬欲更攀陟(의욕경반척) : 다시 또 오르리라 생각했으나
奈被塵網牽(내피진망견) : 진망에 얽힌 몸을 어찌할꺼나
迢迢故人去(초초고인거) : 아득히 친구 따라 떠나
去去洛陽川(거거락양천) : 가고 또 가는 낙양의 냇물
客中復送客(객중부송객) : 나그네가 다시 나그네를 보내다니
我懷益悽然(아회익처연) : 내 마음 속이 더욱더 처량하구나
十步九回首(십보구회수) : 열 걸음에 아홉 번을 고개 돌리고
五步三駐鞭(오보삼주편) : 다섯 걸음에 세 번을 채찍 멈추었도다
凝睇梵王宮(응제범왕궁) : 범왕궁을 흘끗흘끗 바라보는 듯
殿寮藏雲煙(전료장운연) : 구름과 연기는 건물 안 사람을 감추었다
悵望不可見(창망불가견) : 서글피 바라봐도 보이지 않아
獨立涼風前(독립량풍전) :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앞에 홀로 섰노라
悵 슬퍼할 창 睇 힐끗볼 제 迢 멀초
涼서늘할 량
정도전과 권근/허균의 평
조선 중기 관료 허균이 조선을 여는데 중추의 역할을 한 정도전과 권근을 평가하고 있는 글이 있네요. 오늘날 권근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온건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하고 있지요. 교산은 정도전과 권근을 평하면서 정도전에게 죄가 더 있다고 보고 있네요. 아쉽게도 정도전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정도전 스스로의 평안과 부귀를 도모한 일을 지목한 듯하네요. 그래서 여기에 실어 자그마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어요.
무릇 고관(卿大夫)으로 영화와 이권을 누리던 사람은 그 나라의 혁명革命을 만났을 때 의리에 죽거나 절개를 지키지 않는다면 반드시 삶을 도모하여 원수를 섬긴다. 삶을 도모하여 원수를 섬기는 자들에게도 또한 두 길이 있다. 거취의 형세를 엿보아서 그들 임금과 나라를 팔아 넘기며 그러한 계책을 종용해서 부귀를 도모하는 자가 있고, 겁이 많고 나약하여 죽음을 두려워하고는 오직 욕되게 살기만을 일삼으며, 부끄러움을 참고 원수를 잊으면서 구차하게 딴 성씨姓氏를 섬기는 자도 있다. 그들의 죄악에는 비록 경중輕重이 있으나 절의節義를 잃었음은 같다.
겁이 많아 욕된 생명을 탐내고, 수치를 참으며 타인을 섬기는 자들이란 그들의 마음은 애초에 몸을 아끼는 데서 나왔고, 그들의 임금을 팔아넘기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하늘은 더러 그들의 여생을 용서해주었으니, 위魏의 정충鄭沖하증何曾과 같은 사람이 그들이다. 두 사람은 마침내 제집에서 늙어서 죽어갔다.
거취의 형세를 엿보아 종용해서 그들의 나라를 팔아넘긴 자들은 그들의 마음이 애초부터 부귀에 있어 그들의 몸만 이롭게 하였다. 그래서 하늘이 문득 혹독한 화禍를 내려서 보복해 준다. 진晉의 사회謝晦부량傅亮서선지徐羨之 등이 그들이다. 세 사람은 마침내 살육을 당함에 이르렀고, 그들의 일족까지 목 베이게 하였다. 이는 고금古今에 이미 일어난 행적이고, 필연의 이치니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은 다 같이 고리의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신하이자 높이 오른 벼슬아치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도 두 사람 같이 훌륭한 벼슬을 얻었는데, 권근은 제 명대로 죽었고 정도전은 죽임을 당하고 일족까지 멸망시켰으니, 나는 여기에서 더욱 확증을 갖게 되었다.
정도전은 일찍부터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인정을 받아서 외적을 정벌하고 토벌하던 무렵에는 막부幕府의 계획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대왕은 임금의 지위에 오르려던 마음도 없었지만, 정도전이 추대하려는 꾀를 먼저 내었다. 비록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저절로 합해져서 온당한 형편으로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고리에게 정도전은 충신忠臣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정말로 제 몸을 이롭게 하는 데 있었으니, 때문에 끝내는 몸이 살육 당함을 면하지 못했다.
권근은 이색李穡과의 관계로 외방外方에 유배되었는데, 태조太祖의 부름에 행재소行在所로 나와 드디어 등용되어 계속 벼슬이 높아졌다. 권근의 입장에서는 틈을 두지 않고 계속해서 물러나기를 요구함이 마땅한 일이었으나, 겁을 먹고 그의 목숨을 아껴 마지못하여 몸을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때문에 이름과 지위가 높게 되었고 제 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이것은 남의 신하 노릇하는 사람이 경계 삼을 일이다.
고리가 망할 때를 당해서 정도전이 만약 충忠에 죽었고, 권근이 돌아가기를 애걸하여 벼슬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포은圃隱야은冶隱을 숭앙崇仰하는 것과 왜 다르게 하리오. 그러한 계책을 내지 못하고 나라를 팔아넘긴 죄악에 빠지고, 더러는 비겁하게 죽었다는 비난을 받게 되니, 사대부士大夫의 사생존망死生存亡에 대한 처세에 취하고 버리는 일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정도전이 좌명佐命의 날에 살육 당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면, 결코 몇 년 동안의 살아갈 목숨을 아껴서 그의 명성을 훼손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부귀만을 생각하여 그의 지혜가 어두워져버렸으므로 자신의 공로만을 자부하여, 바로 또 임금에게 어린 아들을 세자로 세우자는 계획을 권하여 자신의 세력을 굳히려고까지 했었다. 이는 스스로를 편안하게 하려던 것이었지만 자신을 위태롭게 해버린 것이었다.
나는 이 두 사람 중에서 정도전에게 더욱 죄가 있다고 여긴다[吾於二人。尤有誅於道傳也。].
우리에게<<홍길동 전>>지은이로 잘 알려진 허균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남녀간의 사랑과 우정을 잘 보여준다.
허균이 마음에 품었던 계량이라는 기녀가 있었다.
그녀는 부안 출신이었다.
허균은 글 속에서 그녀가 시를 잘 짓고 글을 이해한 여인이었다고 밝혔다.
계량은 노래와 거문고 연주에도 뛰어나
허균과 친분이 있는 당대 선비들의 연인이기도 했다.
허균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품이 고결하고 굳세어 음란함을 즐기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아껴 막역의 사귐을 나누었다.
담소하며 가까이 지낸 곳에서도 난잡함에 미치지는 않았기에
오래도록 그 만남이 시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시들지 않고 서로를 생각한 사이, 비록 몸은 나누지 않았지만
그것이 어쩌면 더 지극한 사랑의 마음일 수도 있으리라.
몸을 나눈다는 것은 그로부터 온갖 집착이 시작되는 고통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서른 여덟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허균은 계량을 애도하는 <애계량>이라는 시 두 편을 지어 바친다.
**날리는 꽃 공연히 한만 쌓이고
시든 향초 다만 마음 상하네.
봉래도라 구름은 자취도 없고
푸른바다 달빛은 하마 잠겼네.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허균이 바라보는 계량의 그러한 모습은 어쩌면 자신이
<홍길동 전> 이라는 소설에서 꿈꾸었던 이상적인 나라의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
그래서 인지 허균은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떠나 버린 선비들과는 달랐다.
허균이 능지처참당한 진짜 이유는!!!!
역사속 인물중에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가 너무도 잘알고 있는 허균을 좋아해서 하는 질문입니다.....
작년에는 허대감의 외가가 있는 강릉까지 다녀왔는데요..ᅳᅳ;;
대체 왜 허균은 능지처참을 당해야만 했을까요?
명문가의 적자로 태어나 좌참찬,형조판서까지 지낸분이라면 요즘으로치면 법무장관의 지위까지 올랐던 분인데....
더구나 허균은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의 시강원 설서(쉽게말해 선생)까지 지내 후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 광해군과 지기로 지낼정도로 친분도 두터웠다고 알고있습니다..
당시 임금인 광해군의 총애까지 받았던분이...남대문에 흉격을 부쳐 역모를 꾀했다는 사실도 믿기어렵고....
1:정말 허균은 역모를 꽤했을까요? 아무리 허균이 한번 본책은 그자리에서 암기할정도로 뛰어난 두뇌와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의 기질이 있었다고 는 하지만.....자신을 아꼈던 자신만큼 개혁적인 군주 광해군을 배신했을 거라고는 좀...
아니면 허군의 힘이 비대해지는걸 두려워한 이이첨등 대북파의 음모였을까요?
실록을 뒤져보니 허군이 참형당하는날 마지막줄에 허균이 "할말이있다고.."고 외쳤으나 그대로 형장으로 끌려갔다..라고 나와있는데.....당시 좌참찬,형조판서까지 지낸분을 결안도 없이(쉽게말해 판결문),제대로된 재판하나없이 능지처참시킨것도 이해가 안갑니다....
2.허균이 자신은 세상과 잘 융합하지 못한다....라고 고백했을정도로 당시 사대부치고는 파격적인 언행을 보인게 허균의 비극적인 최후와도 관계도 있을까요?
대체 무엇하나 부러울게 없는 명문사대부의 적자가 왜 서자들과 그리 어울렸는지도 이해가 안가요....당시 서얼들 7명이 벌인 칠서의 난때 허군의 연루설까지 있었을 정도면 허군과 서얼들과의 관게도 짐작할수있을정도로 친분이 있었던건 분명한데.....
3.마지막으로.....허균과 난설헌 남매를 어찌 보는지요?
둘다 넘 비극적인 생을 살아서 관심이 많습니다....
정말 세상을 뒤 엎을려고 역모를 꾸민 걸까요? 아님..음모의 희생양일까요?
불운한 천재였다고 생각합니당... 이 시대에서도 이런 천재가 당파싸움에 말려 그 재주가 파묻히지는 않을까...근심한번 해보게하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허균만큼 파란 만장한 생애를 살고 간 인물은 찾기 힘들죠.
그리고 허균의 성격만큼 복잡한 경우를 달리 찾기도 힘듭니다.
그는 일곱 차례나 관직에서 쫓겨났으면서도 ‘거사’를 위해 계획적으로
고위직까지 진출한 유일한 인물이다. 또한 세상을 뒤엎는 혁명 소설을 쓰면서 자신이 직접 ‘혁명’을 계획하고 실천한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 ‘혁명가’였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쓴 소설 『홍길동전』은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었지만 정작 작가의 최후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광해군 10년(1618) 8월 반역의 주모자로 몰린 허균은 두 팔과 두 다리, 머리와 몸통이 6개 조각으로 찢기는 능지 처참을 당하게되죠.
일곱 차례나 관직에서 쫓겨난 앞뒤 사정을 살펴보면
허균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인물입니다. 1589년 누이 허난설헌이 죽은 슬픔을 딛고 생원 시험에 합격한 허균은 임진 왜란이 끝나고 질서가 회복되면서 실시된 1594년의 과거 시험에서 을과(두 번째 등급)로 급제했습니다.
평소 자유 분방한 행동으로 방탕자라는 비난을 받아 온 탓으로 관직 임용이 늦어집니다. 형의 도움으로 1597년 황해도 도사(종5품 벼슬, 오늘날의 부도지사)에 임명되지만 서울의 기생들을 임지로 데려가 별장을 짓고 데리고 놀았다는 이유로 곧 파면되었지요.
해직되어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인 1598년 보란 듯이 문과 중시(문과 급제자들을 대상으로 10년마다 시행하던 시험)에 장원 급제해 조정의 중요 문서를 다루는 관리로 임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일 년도 못 가 방탕한 생활로 다시 해직되구요. 1601년 다시 복직되었으나 2년만에 양반의 품위를 손상한 자로 탄핵받아 관직을 박탈당했습니다.
예조 판서가 된 형의 도움으로 1604년 다시 복직되어 황해도 수안 군수와 성균관 전적(교관)을 거칩니다. 1607년 삼척 부사(요즘의 시장)로 있다가 불교에 심취해, 관청 안에서 염주를 목에 걸고 일하는가 하면 걸승 흉내를 내기도 해 유교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이유로 다시 쫓겨납니다.
네 번째 해직된 그는 1608년에 공주 부사로 복직되었는데 임지에 가자마자 탄핵을 받아 함경도로 유배되고 맙니다. 1610년에는 시험 감독관으로 있으면서 친구와 친척들을 우선 합격시키는 부정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섯 번째 해직을 당합니다.
1612년 12월 일본의 정세를 조사하는 왜정 진주사(倭情陳奏使)가 된 허균은 바로 다음 날 역모 혐의가 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또해직되었습니다.
이처럼 여러 번의 해직을 낳은 허균의 관직 생활은 평소 서얼 차별 같은 신분 제도의 모순에 불만을 품은 그의 자유 분방한 행동의 결과때문이었죠.
그러나 허균이 방탕한 생활로 불만을 표현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서출에게도 관직 임용의 길을 열어 달라는 상소를 제출해 조정의 미움을 사기도 했으며,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여섯 명의 서출 출신들과 강원도 산 속으로 들어가 죽림 칠현을 본떠 강변 칠우(江邊七友)라 자처하기도 하죠.
그의 일곱 번째 해직은 역모 혐의로 인한 것이었는데 일을 함께 꾸민 자들이 입을 다물어 처벌은 면했으나, 전라도 태인에서 거의 감금과 같은 격리 생활을 합니다.
1613년 마지막으로 복직된 허균은 전과 달리 트집 잡힐 일을 피하면서 현실적인 처세를 하는 한편 남몰래 혁명을 준비해 갑니다.
1617년 12월 정책 입안의 총책임자인 좌참찬 자리까지 오르며 왕의 신임을 받던 허균은 자신이 1612년 역모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누설되자 거사를 앞당기기로 합니다.
무력으로 왕궁을 점거해 권좌에 있던 양반 귀족들을 몰살시킨다는 계획 아래,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해 밤에 남산에 올라가 “외적이 침입했으니 서울을 버리고 피난 가라”고 외치기도 하죠. 그러나 불심 검문에 걸린 부하 현응민이 고문에 못 이겨 궐기 계획을 자백하는 바람에 허균 또한 체포당했습니다.
1618년 8월 광해군이 직접 인정전에 나아가 허균 일당을 심문합니다. 그러나 허균의 차례가 되자 그의 입에서 당파 싸움 과정의 음모와 비리가 터져 나올 것을 두려워한 대신들이 왕을 만류했습니다. 왕이 “사형을 속히 해야 마땅하겠지만 물어야 할 것을 물어 본 뒤에 사형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했으나, 대신들은 “도당들이 모두 승복했으니 달리 물어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며 만류했다. 왕이 거듭 “오늘 사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심문한 뒤에 사형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말했으나 대신들의 만류는 거세었다. 이 날의 일을 다룬 『조선 왕조 실록』은 “왕이 끝내 군신들의 협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이 몸소 국문하는 과정을 목격한 사관은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의 「광해군 일기」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때에 이이첨과 한찬남의 무리들은 허균이 사실대로 말하면 그들의 전후 흉모가 여지없이 드러나 다 같이 사형을 받게 될까 두려워했습다. 그래서 자기들의 심복을 시켜 몰래 허균에게 말하게 하기를 “잠깐만 참고 지내면 나중에는 반드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고 하고, 또 허균의 딸이 뽑혀서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갈 참이므로 다른 근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한다면서 온갖 수단으로 사주하고 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 계책은 실로 허균을 빨리 사형에 처해 입을 없애려는 것이었죠.
당시 세자빈 박씨가 아이가 없어 후궁을 들이려했는데 허균의 딸이 유력했죠.
하지만 세자빈 박씨의 외할아버지가 이이첨 이었습니다. 외손녀가 후궁 때문에 홀 방 쓴것을 볼 수는 없죠.
왕이 몸소 국문 할 때 왕이 정상을 캐물으려고 하자 이이첨의 무리들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그 당류들과 더불어 왕 앞에서 정상을 막고 은폐하며 갖은 말로 협박하고 논쟁해서 왕이 다시 캐묻지 못하게 했습니다.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그들의 청을 따라 주자 이이첨의 무리가 서둘러 허균을 끌고 나가게 했습니다.
허균은 나오라는 재촉을 받고서 비로소 깨닫고 크게 소리치기를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했으나, 국청(역적 같은 중한 죄인을 신문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곳)의 상하가 못 들은 척하니 왕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둘 따름이었죠.
허난설현
그녀는 세 가지의 한을 입 버릇 처럼 말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그녀는 짧은 생에 커다란 아픔 앓이만을 하다가 젊디 젊은 나이에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강릉의 명문가에서 두번째 부인의 둘째 딸로 태어나, 아버지는 경상 감사를 지냈던 동인의 영수이고(화담 서경덕의 제자), 큰 오빠 허성은 이조, 병조 판서를, 둘째 오빠 허봉 역시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균 역시 형조, 예조 판서를 지낸 인물입니다. 임금은 동생 허균을 너무나 아끼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노라고 말하라며 울며 애원까지 하게 되지만, 결국 허균은 봉건 사회 타파와,이상 세계 실현에 실패한 것을 슬퍼하며 죽음을 택합니다.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작품을 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난설헌의 글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여 동생은 모두 태워 버리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녀가 만일 평범한 가정 속에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사랑받고 한 집의 며느리로서 대우 받으며 자식들을 그리 떠나보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슴 저미는, 설움 담긴 글들을 우리는 단 한 편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지요.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아내가 죽은 후 재혼하였으나, 아이를 얻지 못하였고 죽은 후에도 본처가 아닌, 후처와 합장하였다고 합니다..
숨막히는 당시 유교 사회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희생당한, 빼어난 미모와 재능의 소유자인 허난설헌의 아픔이 4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얼마 전해 지지 않는 몇 편의 시와 그림 속에서 배어 나오는 듯 합니다. 당대의 학자였던 오빠 허봉에게서 '두보의 소리를 네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라는 극찬을 받았던,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천재 허난설헌의 삶은 곧 남존 여비,여필 종부 등의 유교적 사상과 가치관에 희생된, 한 여인의 슬픔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슬픔입니다... <네이버 지식 인>
숨어사는 즐거움/허균 | 풍류이야기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한정록>을 풀이했다.
이 책은 그의 나이 42세 때 그로서는 극도로 불우한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틈틈이 중국의 고서들을 보면서 예전 선비들의 한적한 삶의 모습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이야기들을 손수 가려 편집한
일종의 독서 노트라 할 수 있다.여기에는 세속을 떠나 숨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 중 기이한 행적을 남긴 자와 고상한 생활을 한 사람들의 일화,그리고 벼슬을 물러난 뒤 한가롭게 살다간 이야기,산천을 두루 보아 정신을 수양하는 이야기 등이 들어 있다.또한 은거하며 살기 위한 구체적인 밥법론을 다룬 글과 도가에서 흔히 거론되는 양생술에 관한 휘귀한 정보도 읽을 수 있다.
4 물러남의 지혜
15.
성재 양만리가 조정에 벼슬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고향집으로 가는데 드는 비용을 계산하여,상자에 넣어 자물쇠를 채운 다음 잠자리 곁에 놓아 두었다.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한가지 물건이라도 사들이지 말라.고향으로 돌아갈 때 부담스러운 짐이 될까 염려스럽다"라고 훈계하면서 날마다 금방이라도 행장을 꾸릴 것같이 했다.이 뜻이 매우 훌륭하다.조정에 벼슬하면서만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세상살이에서도 이렇게 해야한다.무릇 세상살이란 사람에게 있어 여관과 같은 것이다.그런데도 날마다 물건을 사서 보탬으로써 재물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그 재물이 세상 길 떠날 때 부담스러운 짐이 되지 않을 수있겠는가.
-자경편-
5 자연을 벗하며
3.
사람들은 가슴속에 스스로 한 폭의 골짜기를 갖추고 있어야 바야흐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묘사한다.
"산을 보아야 비로소 글을 지을 수 있다.
산이 고요하면 낮도 밤 같고,
산이 담박하면 봄도 가을 같고,
산이 텅 비었으면 따뜻해도 추운 것같고,
산이 깊숙하면 맑아도 비 내리는 것같기 때문이다".
-파라관집-
4.
속세를 벗어나 정을 줄 만한 대상은 오직 산뿐이다.
산은 반드시 사물의 도리를 깊이 관찰하는 눈과 명승지를 탐방하기에 알맞은 체구와
오래도록 머무는 인연이 있어야만 비로소 허물없는 교우관 계를 허락한다.
-소창청기-
7.
신비스러운 골짜기나 오묘한 땅은 고상한 풍류를 지닌 사람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조물주가 몰래 보관해두고 보통 사람들에게 경솔히 보이려 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화양의 구곡산이 금릉의 부도가 되는데,좌원방이 삼개월간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골짜기가 열렸었다.
또 선경으로 이름난 무릉도원도 어느 어부가 우연히 들어갔던 곳이다.
이렇게 보면 오악을 유람하는데도 두려워서 몸을 움츠리는 사람이야 선경의 울타리나마 볼 수 잇겠는가.
현묘한 이치를 탐구하는 것은 오히려 제이의로 떨어지는 것으로,이는 약초를 캐는 사람이 약초를 가탁하여 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산의 기이함을 탐방하는 사람이 산을 빙자하여 글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선경이 보통 사람에게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산신령이 꼭꼭 숨겨둔 채 그 선경을 영광스럽게 해줄 사람을 기다리기 땜분이다
-자비록-
6 청산에 사는 뜻
2.
사혜는 함부로 사람을 사귀지 않아서 잡스런 손님이 그 집 문을 드나들지 않았다.
가끔 혼자 술을 마시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방을 드나드는 것은 오직 맑은 바람뿐이요,
나와 대작하는 것은 다만 밝은 달이 있을 뿐이다".
-하씨어림-
4.
반사정이 숭산의 소요곡에 살때 고종이 불러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사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바라는 바는 무성한 소나무와 맑은 샘이 산중에서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씨어림-
6.
왕백곡이 말하기를"남은 돈으론 단지 책을 살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돈이 남기를 기다린다면 천하에 책을 사볼 사람이 없어서
벌써 눈이 메말랐을 것이다.나는 생활비를 줄여서 책가게에 가서 책을 샀으니,
이것은 일찍이 돈을 절약하여 책을 산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미공비급-
8.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제아무리 화려한 것이라도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은 제아무리 시끄럽게 굴더라도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런 까악에 도를 추구하는 사람은,입산 할 때는 오직 그곳이 깊은 곳이 아닐까 걱정이며,
숲에 들어갈 때는 오직 은밀한 곳이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다.
-소창청기-
9.
송나라 조사서가 "나에게는 평생 세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이 세상 모든 훌륭한 사람을 다 알고 지내는 것이요,
두번째 소원은 이세상 모든 양서를 다 읽는 일이요,
세번째 소원은 이세상 경치 좋은 산수를 다 구경하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였다."다야 어찌 볼 수 있겠소.
다만 가는 곳마다 헛되이 지나쳐버리지 않으면 됩니다.
무릇 산에 오르고 물에 가는 것은 도의기미를 불러 일으켜 마음을 활달하게 하니 이익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가 덧붙여 말하기를,"산수를 보는 것 역시 책 읽는 것과 같아서
보는 사람 취향의 고하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학림옥로-
10.
원풍 6년 10월 보름날에 밤에 막 옷을 벗고 잠을 자려고 하는데,
밝은 달빛이 방안에 비치어 벌떡 일어났으나,생각해보니 함께 노닐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드디어 승천사로 가서 장회민을 찾았더니,회민도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뜨락을거니는데,뜨락은 마치 호수와 같아서 물 속에 수초가 서로 엇갈려 있는 듯하였으니,
대개 그것은 대나무와 잣나무의 그림자가 달빛에 서로 엇갈려 있는 것이엇다.
어느 날 밤인들 달이 없으며 어느 곳인들 대나무와 잣나무가 없으련만,
다만 우리 두 사람처럼 한가로운 정취가 있는 사람이 드문 것뿐이다.
-소문총공집-
16.
꽃을 감상할 때는 모름지기 호걸스러운 벗과 어울려야 하고,
기녀를 볼 때는 모름지기 담박한 벗과 어울려야하고,
산에 오를 때는 모름지기 초일한 벗과 어울려야 하고,
물에 배를 띄울 때는 모름지기 광활한 벗과 어울려야 하고,
달을 볼때는 모름지기 삽상한 벗과 어울려야하고,
눈을 볼 때는 모름지기 염려한 벗과 어울려야하고,
술을 마실때는 모름지기 운치 있는 벗과 어울려야 한다.
-미공비급-
17.
강산과 풍월은 본래 일정한 주인이 없고,
오직 한가로운 사람이 바로 주인인 것이다.
-소문공충집-
7 가난한 삶의 여유
4.
진원용은 집이 극히 부유하고 책 모으기를 매우 좋아했는데 재산 관리에는 힘쓰지 않았다.
누가 재산 불리기에 대해 묻기라도 하면 원용은,
"재물을 모으기를 좋아하는 자손이 있다면 논과 밭을 마련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스스로 장만할 것이고,
좋아하는 자손이 엇ᄇ으면 비록 논과 밭을 남겨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뒷날 세 손자가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리고 청빈한 것을 스스로 지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선인의 격언을 잊을 수 없다"
-공여일록-
10.
어록에 이렇게 말했다.
"사치한 자는 삼년 동안 쓸 것을 일년에 써버리고,
검소한 자는 일년 동안 쓸 것을 삼년토록 쓴다.
지극히 사치한 자는 그것도 오히려 부족하고
아주 검소한 자는 오히려 여유가 있다.
사치한 자는 부유해도 만족하지 않고,
검소한 자는 가난해도 여유가 있다.
사치한 자는 언제나 마음이 가난하고
검소한 자는 언제나 마음이 풍요하다.
사치한 자는 친한 사람을 좋아하므로 잘못이 많고,
검소한 자는 사람을 멀리할 수 있기 때문에 화가 적다.
사치한 자가 임금을 섬기면 반드시 욕굄이 잇고
검소한 자가 임금을 섬기면 반드시 그 벼슬을 온전히 보존하다.
사치한 자는 근심이 많고,검소한 자는 복이 많다.
검소함을 따르는 자는 천하의 통치자가 될 수 있다".
-지비록-
13.
사마광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귀로 사물을 보고 눈으로음식을 먹지 않는 자가 드물다"라고하니,
이 말을 듣고 어떤 자가 이상하게 여겨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반문하였다.
그러자 사마광이 대답하였다.
"이ᅳ관은 외모를 꾸미는 것이니 몸에 맞아야 아름다운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소리만 듣기를 바란다.
어찌 이것이 귀로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음식물은 맛을 보고 먹는 것이니 입에 맞는 것이 좋은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과자에 알록달록 조각을 하여음식상을 감상하니 이것이 어찌 눈으로 먹는 것이 아니겠느냐".
-공여일록-
8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2.
유영은 항상 술을 실컷 먹고 방탕하여 혹 집에서 벌거벗은 알몸으로 있기도하였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나무라면 유영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천지를 집으로 삼고 이 방을 옷으로 삼는데,여러분은 무슨 일로 나의 옷 속에 들어 왔는가?"
-세설신어-
8.
왕휘지는 산음에 살았다.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잠이 깨자 방문을 열어 놓고 술을 따르라 명하고 사방을 보니 온통 흰 빛이었다.
일나서 거닐며 좌사의 <초은시>를 외다가 갑자기 대규 생각이 났다.이때 대규는 섬계에 있었다.
그는 작은 배를 타고 밤새 가서 대규 집 문에 이르렀다가는 들어가지 않고 돌아섰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흥이 일어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가니,
어찌 꼭 대규를 보아야 하는가?"
-세설신어-
9 장부의 뜻은 우주와 같다
2.
조물주가 사람에게 공명과 부귀를 아끼지는 않으나 한가한 것만은 아낀다.천지 사이에는 천지 운행의 기틀이 발동하여 돌고 돌아
한 순간도 정지하는 때가 없는 것이다.이와 같이 천지도 한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그러므로 높은 벼슬에 많은 녹을 받는
사람이나 좋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 그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조용히 세속적인 데서 떠나 물러날 줄을 아는 자는 매우 적다.
그리하여 그들 중에는 날마다 재산을 모으로 좋은 집을 지으려는 생각뿐이나
한번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죽고 마는 사람도 있다.그러나 다행히도 집에서 먹고 지낼 수만 있따면
정말 한가한 생활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 좋을 텐데도
돈지갑만을 꼭 간수하려고 손을 벌벌 떨고,금전출납부만을 챙기면서 마음을 불안하게 먹고 있으니
어찌 낮에만 부산하여 바쁘겠는가.밤 꿈에도 뒤숭숭할 것이다.
이러한 처지에 있따면 좋은 산수와 좋은 풍경에 대해서야 어찌 일찍이 맛을 알겠는가.
그리하여 부직없이 삶을 수고롭게 하다가 죽어도 후휘할 줄 모른다.
이들은 실로 돈만 모을 줄 아는 수전노로서 자손을 위하여 소나 말과 같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수전노보다도 더 심한 자가 있으니 그들은 자손을 위하여 거의 독사나 전갈같이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면 한가함을 얻지 못하니
한가한 사람이 바로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네
라는 시구가 있다.
-문기유림-
7.
곽단이 말하였다.
"유선생이라는 사람이 형산 자개봉 아래에서 현의 저자를 사이에 두고 살았따.
그는 끼니때마다 걸식하였으며 돈을 얻으면 술을 사 마시고 취하여 돌아갔다가 낮이면 다시 나타나곤 하였따.
그러던 중 어떤 부유한 사람이 그에게 도포 한벌을 주니 유서너생은 기뻐하며 사례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며칠 뒤에 다시 그를 만나보니 여전히 전에 입던 베옷을 입고는 말하기를,
나에게 자네가 누를 끼쳤네.
내가 그전에는 암ᄇ자를 나오면 아무데서나 빌어먹을 곳이 있고
잠자리에 들어도 문을 잠그지 않았는데,
도포를 얻은 뒤로부터는그것을 입지 않고 나가면 마음이 항상 거기에 매여 편치 않았네
그리하여 자물쇠를 한개사서 나갈 때면 방문을 잠그고,
혹 도포를 입고 나갔다가 밤에 돌아와서는 방문을 굳게 잠가 도둑을 방비하였네
이처럼 며칠 동안을 악착같이 하다보니 내 스스로 마음이 편치 못하였는데,
오늘 우연히 도포를 입고 저자에 나갔다가 갑자기 이 도포 한벌 때문에 마음이 그렇게 되엇따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야말로 크게 웃을 일이네.마침 앞에 지나가는 한 사람을 만났기에 벗어서 그에게 주었더니
내 마음이 비로소 편하였네.자네가 나에게 누를 끼쳤네,라고 하였다.
-문기유림-
10 동쪽 울타리에 국화를 심고
7.
유거하는 것이 비록 세상과 단절된 것은 아니지만,모든 것을 사람들을 시켜 장만하도록 하여
교유하는 사람들과 만나 노는 일은 마치 세속을 벗어난 것과 같게 된다.
화초들은 비복이 디ᅩ고,새소리는 담소에 해당되며,
계곡의 나물들과 흐르는 물은 술안주와 국을 대신하게 된다.
서사는 스승이 되고,대나무와 돌은 벗이 되며,빗소리.구름 그림자,솔바람 나월*은
한때의 흥이 도도한 가무가 되어,정경이진실로 농숙하고도 화려하게 된다.
-소창청기-
*담쟁이 잎 사이로 보이는 달
11.
산에서 사는 것이 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낫다.
대개 여덟가지 덕이 있으니
까다로운 예절을 책망하지 않게되고,
생소한 손님을 만나지 않게되고,
술과 고기를 혼식하지 않게되고,
논밭과 집을 다투지 않게 되고,
세태를 묻지 않게 되고,곡직을 다투지 않게되고
글빚을 받지 않게 되고,벼슬의 이동을 말하지 않게 된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라면,곧 소 흥정하는 가게이고 말 매매하는 역이다.
-소창청기-
11 옛사람의 작은 가르침
7.
사마광이 말하였다.
"풀이 걸음을 방해하거든 깎고,
나무가 관을 방해하거든 자르라.
기타 다른 일은 모두 자연에 맡겨야 하니,
천지 사이에 서로 함께 사는 것이라
만물로 하여금 제각기 그 삶을 완수 하도록 할 것이다.
-공여일록-
12.
날 때 모두 한가지 물건도 가지지 않고 이세상에 왔으니
가난한들 무슨 손해가 있으며,죽을때 모두 한가지 물건도 가지지 않고 가니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성학계관억설-
14.
문을 닫고 불경을읽는 일
문을 열고 가객을 접대하는 일,
문을 나가 산수를 찾는 일,
이 세가지는 인생의 세가지 즐거움이다.
-소창청기-
15.
매화를 심고 학을 길렀던,송의 은군자 임포가 성심전요에서 말하였다.
만족할 줄 알면 즐겁고,탐욕에 힘쓰면 근심스럽다.
16.
장무진의 석복의 설에 이렇게 말하였다.
"일은 완벽하게 끝을 보려하지 말고,
세력은 끝까지 의지하지 말고
말은 끝까지 다하지 말고,
복은 끝까지 다 향유하지 말라">
-공여일록-
20.
산에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거기에 미련을 가지고 연연하면
사람이 많이모이는 곳에 있는 것과 같고 서화감상이 고상한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거기에 탐욕을 내면 서화 장사나 마찬가지이며
술을 마시는 일이 즐거운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남의 권유에 따르면 지옥과 마찬가지고
손님을 좋아하는것은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일이지만
속된 무리에게 한번 끌리면 고해와같다.
-감주사부고-
23.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고,
시내는 흐르고 돌은 서 있고
꽃은 새를 맞아 웃고
골짜기는 초부의 노래에 메아리치니
온갖 자연 정경은 스스로 고요한데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 소란하다.
-소창청기-
12 글 읽기의 즐거움
3.
독서에는 독서하기 좋은 때가 있따.
그러므로 위나라 동자의 삼여의 설이 가장 일리가 있다 그는 말하기를,
"밤은 낮의 여분이요,비오는 날은 보통 날의 여분이요,겨울이란 한해의 여분이다.
이 여분의 시간에는 사람의 일이 다소 뜸하여 한마음으로 집중하여 공부할 수 있따"라고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맑은 날 밤에 고요히 앉아 등불을 켜고 차를 달이면,
온 세상은 죽은 듯 고요하고 간간이 종소리 들려올 때
이러한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책을 대하여 피로를 잊고
이부자리를 걷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이것이 첫째 즐거움이다.
비바람이 길을 막으면 문을 잠그고 방을 깨끗이 청소한다.
사람의 출입은 끊어지고 서책은 앞에 가득히 쌓였다.
흥에 따라 아무 책이나 뽑아든다.
시냇물 소리는 졸졸졸 들려오고
어차 밑 고드름에 벼루를 씼는다.
이러한 그윽한 고요가 둘째 즐거움이다.
또 낙엽이 진 나무숲에 세모는 저물고
싸락눈이 내리거나 눈이 깊게 쌓인다.
마른 나뭇가지를 바람이 흔들며 지나가면 겨울 새는 들녘에서 우짖는다.
방안에서 난로를 끼고 앉아 있으면 차 향기에 술이 익는다
시사를 모아 엮으면 좋은 친구를 대하는 것같다.
이러한 정경이 셋째 즐거움이다.나는 일찍이 이러한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부연하여 여러 사람과 같이 나누고자 한다.
-소창청기-
5.
지난날 옛것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위로는 층층의 단애를 엿보고
아래로는 깊은 연못까지 내려가서 무릇 비문,판각,솥에 새긴 글 등을 모두 찾아 전하였다.
거기다가 운향이나 혜초를 끼워 향기를 나게하며 옥색이나 담황색의 비단으로 책답을 만들어 보호하는 등,
그 전적에 대한 기벽이 이와 같았따.나도 비루하지만 젊어서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호로 삼아 이상한 책을 많이 모아서
매양 기쁜 마음으로 자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지 못했던 책을 읽을 때에는 마치 좋은 친구를 얻은 것같고,
이미 읽은 책을 볼때는 마치 옛친구를 만난 것같다.
나의 천성은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즐거워하나 언행에 허물이 있을까 두려우니
이 책들이나 의지해 문을 걸고 늙으리라".
이에 죽창 아래에서 옛날에 들은 바를 기억해 독서십륙관을 만들었으니
이는 불교 정토종의 경전에 십륙관경이 있는 것을 따른 것이다.
-미공비급-광함
13 풍류는 선비의 좋은 짝
3.
명의 진계유가 말하였다.
"향은 사람의 생각을 그윽하게 하고
술은 사람의 뜻을 원대하게 하고
돌은 사람의 뜻을 강하게 하고
거문고는 사람의 뜻을 적막하게 하고
차茶는 사람의 뜻을 시원하게 하고
대竹는 사람의 뜻을 서늘하게 하고
달은 사람의 뜻을 외롭게 하고
바둑은 사람의 뜻을 한가하게 하고
지팡이는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하고
물은 사람의 뜻을 비게하고
눈은 사람의 뜻을 넓게 하고
칼은 사람의 생각을 슬프게하고
포단*은 사람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
아름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워하게하고
중은 사람들을 담담하게 하고
꽃은 사람들을 운치가 있게 하고
금석이정은 사람을 고아하게 한다.
-미공비급
*부들로 만든자리
14 은둔하는 법
1
산거에 필요한 도구:
경서와 베틀을 준비하여 풍속의 교화와 자손의 교육에 사용하고
약품과 의서를 준비하여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질병을 막는데 쓰고
좋은 붓과 종이를 저장하여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는데 쓰며
맑은 술과 여러가지 채소를 심어서 손님의 접대오 홀로 술을 마실때 쓴다.
또 떨어진 옷과 낡은 갓을 수선해두었다가 눈 내리고 바람 불때쓰고
아름다운 돌과 좋은 먹.오래된 옥돌.기이한 서적 등을 수집하여 긴 날의 지루함을 덜고
유서침*과 노화피**를 만들어서 침상을 잇대놓고 밤에 이야기를 즐기는데 쓰고,
황면노수***와 백발의 어부를 가까이하여 늙는 근심과 번거로운 세상사를 잊도록한다.
-암서유사-
*버들개지를 넣은베개
**갈꽃을 넣어서 만든 이불
***석가여래의 별칭.여기서는 중을 가리킨다.
5.
송의 사마광이 차와 먹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따.
"차와 먹,두가지는 성질이 꼭 서로 반대이다.
차는 흰 것을 좋은 것으로 치는데 먹은검은 것을 치고
차는 무거운 것을 치는데 먹은 가벼운 것을
차는 새것을 치는데 먹은 오래 묵은것을 친다".이에 소동파가
"상품의 차와 뛰어난 먹은 다 함께 향기로우니 이는 그 덕이 같은것이고,
모두 성질이견고하니 이는그 지조가 같은 것이다.
비유컨대 현인과 군자가 그 지혜와 아름다움의 정도가 같지는 않지만
그 덕과 지조는 한가지인 것과 같다"라고 하니 사마광이 매우 옳게 여겼다.
-소문충공집-
7
산속에서 생활은 비록 뛰어나게 맛있는 것은 없지만
청아한 맛은 자못 풍부하다.나는 연 종류에서는 도톰히 살찐 열매와 뿌리의 단맛을 취하고,
마름 종류에서는 감의 따스함과 마름의 줄기를 얻고,
나무 종류에서는 대나무의운치와 고菰나무의 아름다움을 취하고
나물 종류에서는 순채의 향긋함과 아욱의 담박함과 토란의 미끄러움을 취한다.
또 계수나무로 기름을 내고 국화를 심고 매화로 장을 담근다.
농어회와 포를 준비해 곁들여놓고 농사일을 얘기하다가 거문고와 서화에까지 말이 미친다.
이같이 조석으로 편히 누워 태평함을 즐기니 큰 벼슬자리의 즐거움이 어찌 이보다나을 것인가.
-미공비급-
8
차를 끊일 때는 불을 너무 세게 하면 좋지 않으니 세게 하면 맛이 지나치게 쓰다.
그러므로 바위 틈에서 나는 물이나 솔잎을 스치는 바람과 같은 소리가 나는 정도로 끊이는게 좋다.
또 차를 거를 때는 갑자기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병에 옮기고 불을 끈 뒤에 잠깐 끊는 것이 그치기를 기다려서 걸러야 절도에 맞는다.
-미공다동-
15 도인의 길
1.
사람의 정신은 맑은 것을 좋아하는데도 마음이 동요를시키고,
마음은 고요함을 좋아하는데 욕심이 유인한다.
언제나 욕심만 버릴 수 있다면 마음은 자연 고요해지고
마음만 맑게 갖는다면 정신은 자연 맑아지는 것이다.
-도서전집-
2.
삶이란 죽음의 뿌리요,죽음이란삶의 뿌리다.
은혜는 해로움에서 생기고 해로움은 은혜에서 생긴다.
동심만 없애고 조심은 없애서는 안되며
마음은 비게 가지고 한 곳에 집착하지 말 것이다.
-도서전집-
3.
잡념이 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늦게 깨닫는 것이 문제이다.
잡념이 이는 것은 병이고,
계속되지 않게 하는 것은약이다.
-금단정리대전-
4.
입속에는 말이 적게
마음속에는 일이 적게
밥통 속에는 밥이 적게
밤이면 잠을 적게
이대로 네가지만 적게 하면신선도 될 수 있다
-현관잡기-
6.
너무 성내면기운이 손상을 입고 생각을많이 하면 정신이 손상된다.
정신이 피곤하면 마음이 부림을 당하고 기운이 약하면 병이서로 침범한다.
너무 슬퍼하거나 기뻐하지 말고 음식은 언제나고르게 먹어야 한다.
두번 세번 삼가서 밤 술에 취하지 말고 새벽에 성내는 일을가장 조심하라
저녁에 잘 때 운고를 울리고 새벽에 일어나 옥진으로 양치질하면
요사가 몸에 덤비지 못하고 정기가 자연 충만할 것이다.
모든 병마에서 벗어나고 싶거든 언제나
오신 먹기를 삼가라 정신을 편안히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며 기운을 아껴 화순을 보전하라
누가 수요를 운명이라 하는가.그것을 가꾸기는 사람에게 달렸으니 그대 능히 이치를 존주우한다면
평지에서 진군을 뵐 수 있을 것이다.
-현관잡기-
9.
사람이 공기 속에 있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 있는것과 같은 것이다.
물이 물고기를 기르고 있지만 물고기는 그것을 모르고,
공기가 사람을 기르고 있찌만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기운을 기르려면 우선호흡부터 조절해야 한다.
호흡을 조절하는 법은 먼저 참선을 하듯이 고요히 앉아
마음을 맑게 하고는 눈으로 코를 보고 코는 배꼽을 대하여
호흡을 고르게 하면서 가쁘고 쉬지 말고 들이쉴 때는 기운이 아래서 위로,
내쉴때는 기운이 위에서 아래로 이동하게 하며,
한번 오르고 한번 내려갈 때 아주 자연스럽게 숨을
쉬는듯 마는 듯하면서도 잠시도 끊이지 않게 하고
다만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 따라 조금씩 조정하면 된다.
-수진비록-
천 개의 얼굴과 반역의 삶 ..... 허균과 ‘홍길동전’
글쓴이: 조청일 조회수 : 25 08.08.24 17:43 http://cafe.daum.net/kjminhak/NAja/682
고전문학사 라이벌 / 허균 VS 권필 - 비극적 죽음도 닮은 동갑내기 / 체제의 아웃사이더
1612년 4월7일 함경도 경원 유배길에 오르려던 권필(權?)이 세상을 떴다. 국가 권력에 빌붙어 권세를 부리던 외척 유희분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는 혐의로 광해군의 친국(親鞫임금이 직접 중죄인을 심문하는 일) 아래 혹독한 형벌을 받은 직후였다. 들것에 실려 동대문 밖으로 나왔다가 친구들에게 막걸리를 청해 마셨는데 장독이 올라 이튿날 죽음에 이른 것이다.
그로부터 6년 여의 세월이 흐른 1618년 8월26일, 서울의 서쪽 저자거리에서 허균(許筠)이 처형됐다. 본인이 승복하지 않아 마지막 판결문도 없었지만 역모죄로 다스려진 까닭에 그의 머리는 막대에 매달려 거리에 내걸렸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고, 절친한 벗이었으며, 당대의 탁월한 시인이었다. 비극적 최후가 말해 주듯 횡포한 봉건 지배체제로부터 가혹하게 제거됐다는 점도 비슷했다. 행적과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이들은 누구보다 체제의 아웃사이더 또는 저항인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음이 분명하다.
천 개의 얼굴과 반역의 삶, 허균
1569년(선조 2년)에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나 1618년(광해 10년)에 역모죄로 서울 서쪽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됐다. 손곡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26세 이후 벼슬길에 들었으나 불도를 숭상한다는 등의 이유로 자주 탄핵을 받았다. 불교, 도교, 양명학 등에도 밝았고 서얼천민과도 교류, 현실비판적인 시문과 체제 저항적인 산문 및 소설을 남겼다.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과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 시문집 '성소부부고' 등이 전한다.
‘예교(禮敎)에 어찌 묶이고 놓임을 당하겠는가(禮敎寧拘放)/ 부침(浮沈)을 다만 정(情)에 맡길 뿐이라네(浮沈只任情)/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쓰시게(君須用君法)/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이루려네(吾自達吾生)’ _‘벼슬에서 파직됐다는 소리를 듣고(聞罷官作)’ 관청에서 부처를 받들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면된 허균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시이다.
그의 뜻은 예교에 속박되지 않고 정의 이끎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예교란 무엇인가? 삼강오륜으로 규범이 된 조선 제일의 윤리도덕이며 절대 복종만이 요구되던 불변의 당위이다.
하지만 허균은 통념적 도덕률에 굴종하기보다는 본성과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자기 방식의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이때는 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이 이단으로 간주됐지만 그는 불교에 심취했고, 도교에 빠져드는가 하면, 양명학 좌파를 넘나들었고, 서학을 수입했다.
양천 허씨 명문가의 막내로 태어나 문명을 날리던 허균이 자유분방한 생활태도를 지니게 된 것은 20대 전반기에 겪은 가족사의 비극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아껴주던 형님 허봉의 정치적 좌절과 죽음, 누이 허난설헌의 요절, 임진왜란의 피란길에서 당한 아내와 아들의 죽음 등 큰 충격을 연속으로 겪었다.
하지만 이미 크고 작은 민란이 발생한 데서 알 수 있듯 허균은 당시 조선시대 체제의 모순에 더 근원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적서차별의 신분 모순과 백성들의 황폐한 삶, 피비린내 나는 당쟁 등에 대한 허균의 비판적 인식은 그의 수많은 시 작품과 ‘호민론’ ‘유재론’과 같은 산문, ‘홍길동전’ 같은 소설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표준이나 중심을 거부하는 사람의 삶에서는 자유와 개성의 향기가 뚜렷하다. 허균은 서얼이나 천민 등이 지닌 재능을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했으며 그만큼 그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차별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또한 이들과의 사귐도 도타워서 넉넉지 않은 월급을 쪼개서 생계를 몸소 돕기도 했다.
허균의 혁명적 사고는 이런 휴머니즘의 실천과정에서 싹튼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행동은 종종 예측하기 어렵고 괴상하기까지 한데 특히 만년의 정치적 선택이 그러하다. 광해군, 거물 이이첨과 제휴하여 대북파(大北派선조때 북인 중에서 홍여순 등이 남이공 등의 소북에 대립해 이룬 당파)에 참여하고 폐모론(廢母論선조의 왕비이며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비하자는 대북파 이이첨 정인홍 등의 주장)을 주창한 데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며, 역모 사건에 대해서도 시빗거리가 남아 있다.
조선왕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허균은 역적이었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참으로 다양했다. 체제의 이편에서는 ‘천지간의 한 괴물’로, ‘성품이 올빼미 같고 행실은 개와 돼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는 그가 중세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뚜렷한 개성과 다양성을 지닌 천의 얼굴의 소유자였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비판적 지성과 풍자의 정신, 권필
1569년(선조 2년)에 서울 마포의 현석촌에서 태어나 1612년(광해 4년)에 동대문 밖에서 죽었다. 정철의 문인이며 허균과도 절친했다. 신묘당사(辛卯黨事1591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벌어진 동인의 서인 탄압)로 정철이 유배되는 것을 보고 정계의 뜻을 접고 다시는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훗날 벼슬 없는 선비로 원접행차에 시나 글을 짓는 제술관(製述官)으로 발탁돼 이름을 떨쳤으나, 평생 벼슬하지 않고 풍자적 저항시인으로 살았다. '주생전' 등의 소설과 '석주집(石洲集)'이 남아 있다.
‘궁궐 버들 푸르고 꽃잎 어지러이 날리는데(宮柳靑靑花亂飛)/ 성 가득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양 떠네(滿城冠蓋媚春暉)/ 조정에선 입 모아 승평의 즐거움 하례하는데(朝家共賀昇平樂)/ 누가 포의(벼슬없는 선비)의 입에서 위태로운 말이 나오게 했나(誰遣危言出布衣)’ _‘임숙영의 삭과 소식을 듣고(聞任茂叔削科)’
1611년에 재야 선비 임숙영이 전시(殿試임금 앞에서 치르는 시험)에서 왕실 외척의 교만함과 왕비의 정사 관여를 문제 삼는 글을 지었다. 이를 본 광해군이 대로하여 방(榜)에서 그의 이름을 빼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권필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즉시 그 일을 풍자하여 지은 시가 바로 이 ‘궁류시(宮柳詩)’이다.
그리고 이 시 한 편 때문에 권필은 결국 죽음으로 내몰렸다. ‘궁궐 버들’은 유희분 등의 외척 유씨, ‘봄볕’은 광해군, ‘포의’는 책문을 쓴 임숙영에 대응된다. 이렇게 보면 궁정의 봄 풍경에 빗댄 권력과 그 주변 아첨꾼들의 행태가 우스꽝스럽게 드러난다.
권필의 사상은 허균처럼 체제 전복적이거나 일탈적인 정도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중년에 그는 강화도에 머물면서 성리학의 연원과 도통을 살핀 저술을 남기기도 하고, 성리학적 수양에 더욱 침잠하기도 했다. 그의 사유는 때때로 탈주를 꿈꾸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체제 수호적이다.
그러나 항상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는데 이는 청소년기의 독특한 가정 환경의 영향이 크다. 그의 부친 권벽은 여러 왕들의 실록을 편찬하는 등 오랫동안 사관을 지냈는데 절친한 벗이 직무와 관련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하는 중에도 평생 남과의 교유를 끊고 폐쇄적 삶을 살았다.
세상에 말없이 항의하며 침울하게 살아간 아버지, 불의한 세태와 타협하지 않는 형들 아래 권필은 강인한 비판적 지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누구보다 존경했던 스승 정철이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이산해 등 동인 세력의 모략으로 귀양길에 오르자 권필은 정계에 환멸을 느끼고 입신출세의 길을 아주 접어버린다.
이후 방랑의 시절을 보내며 전란으로 유린된 강토와 백성들의 찢긴 삶을 직접 눈으로 보고 지배계급에 풍자의 비수를 겨누는 시적 태도를 유지했다.
탐욕스러운 세도가의 신도비(神道碑종이품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를 세우기 위해 파헤쳐지는 돌과 그것을 나르는 민중의 노역을 묘사한 ‘충주석(忠州石)’, 당쟁을 뼈다귀를 놓고 싸우는 개들에 빗댄 ‘투구행(鬪狗行)’ 등은 사회 모순을 포착, 현실주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빼어난 작품들이다
중세적 삶의 질곡과 낭만적 해결의 두 방식
허균과 권필은 당대의 빼어난 시인일 뿐만 아니라 고전소설사에서도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는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 허균의 대표 소설은 ‘홍길동전’이며, 권필의 대표작은 ‘주생전(周生傳)’이다. 중세적 삶의 질곡과 그 해결을 향한 낭만적 상상력을 담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주제와 형상화 방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홍길동전’은 16세기 연산조에 실재했던 농민저항 지도자 홍길동을 소재로 했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의 실현이라는 중심주제를 담고,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며 신분차별을 극복하는 민중적 영웅상을 낭만적으로 구현했다. 율도국의 건설, 즉 유토피아적 이상사회 건설로 끝나는 이 소설은 당대 모순을 해결하는 주된 동력으로 민중의 저항적 에네르기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주생전’은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전기소설의 형식에 담은 작품이다. 임진왜란 때 만난 명 나라 군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주생, 배도, 선화라는 세 남녀가 벌이는 애정의 삼각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애정 갈등과 죽음, 그리고 조선 출병으로 인한 기약 없는 이별 등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비극적 삶의 과정을 낭만적 상상력으로 펼쳐낸 것이다.
허균이 신분갈등이라는 사회적 주제를 가지고 정공법으로 더 나은 삶을 설계했다면, 권필은 애정갈등이라는 남녀간의 문제를 통해 다분히 우회적으로 현실 삶의 불안을 떨쳐내려 했다. 주제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는 속박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형대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그림 박성태화가
교산 허균과 난설헌 허초희는 문향(文鄕) 강릉이 낳은 빼어난 오누이 문인이다.
(허난설헌)
허난설헌(許蘭雪軒 : 1563~1589),
조선중기의 여류시인, 애상적이고 도교적인 시풍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룸, 허균의 누이.
주요저서 : <난설헌집>
허균(許筠 : 1569~1618),
조선중기의 문인, 정치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 저술,
주요저서 : <성소부부고> 등
교산 허균 (許筠 1569~1618 )의 파란만장한 생애 - 개혁사상가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
"사람의 일이란게 어그러짐만 많아라/따뜻한 햇볕 은택 입어 시든 이몸 되살아나면/여기로부터 동쪽 길로 채찍질하며 돌아가리라/고향 뜨락엔 솔과 국화 아직도 오솔길 셋이 있으리니/늙어서 농사일이나 즐기자고 내 스스로 결단했네/산과 골짜기 풍류가 우리들 일이거니/붕새의 길 따라 잡으려는 생각 다시 않으리라/내 이 몸이 강건하고 그대 또한 건장하니/서로 손 마주 잡고 찾아다님도 좋으리라" - <'경포호를 그리워하며’중>
허균이 태어난 외갓집인 애일당이 사천면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집이 있었던 이곳에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미 구축된 사회규범에 승복해 그저 평범한 삶을 살기보다 타고난 성품에 따라 자신의 삶을 개척하겠다며 26세에 첫 벼슬에 올라 역모를 꾀한 죄인으로 50세에 처형당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선생의 삶 속에서는 어린시절의 추억이 남아있는 고향 강릉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고 강릉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을 자주 시로 옮기기도 했다.
조선중기 강릉 사천서 태어나(서울 출생 설도 있음) 경포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탐승하며 시를 읊고 문학성을 키워 온 허균(1569~1618)은 혼란한 시대에 잦은 국난과 외침, 파쟁에 시달리면서도 부패해 무너져가는 국가를 걱정하고 새로운 이념을 제시했던 문인이자, 개혁적인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의 본관은 陽川(양천), 자는 端甫(단보), 호는 陽川人(양천인)․ 蛟山(교산)․惺所(성소)․惺翁(성옹)․白月居士(백월거사) 등으로 불렸다.
용(이무기․蛟)이 나타났다고 하는 강릉 사천면에 있는 용문암.
허균은 이를 따서 자신의 호를 교산(蛟山)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許曄)과 부인 강릉 김씨가 낳은 세자녀 허봉, 허초희(난설헌)에 이어 막내로 태어난 선생은 첫째 부인 청주 한씨에게서 태어난 허성과 함께 허씨 5문장가를 이루며 문학성이 돋보였다.
불과 아홉살에 시를 지었고 뛰어난 기억력으로 많은 책을 줄줄이 외우는 등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으며, 당시 천재시인으로 이름난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우고 서애 유성룡에게서 문장을 배웠다.
덕분에 선생은 시문과 소설 희곡 비평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생이 25세때 쓴 학산초담(鶴山樵談)은 택당 이식이 말한 것처럼 '허균이 시를 잘 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 모두 108편의 이야기가 수록된 이책에는 강릉의 인물에 대해 평하며 경포대와 한송정에 아름다운 시가 없는 까닭 등 자신의 평가를 서슴없이 기술했다.
강릉 초당동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허균을
기리는 문학비가 자리하고 있다.
또 이 책에서는 "원한 맺힌 기운은 아득히 끝없어/산하가 한가지 빛이고/온 나라엔 사람도 없는데/하늘마저 달이 어두워라"고 꿈속에서 본 임진왜란의 징조를 읊기도 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로 우리에게 친숙한 '홍길동전'에서는 그가 문인으로서의 뿐만아니라 사회제도의 모순을 폭로하는 진보적 성향과 현실주의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또 선생의 개혁사상이 잘 반영돼 있으며 조선후기 서민문학으로의 발전을 가능케 할 만큼 국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일반적인 선비의 풍조대로 유학을 배워 교양을 쌓았고 관계에 진출한 선생에게서 돋보이는 개혁적인 성향은 성리학적 이론만을 강조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당시 이단으로 꼽는 불교와 도교에 빠져드는 등 관아에서도 부처를 받들어 파직되기도 했고 사명과 같은 고승들과 참선을 문답하기도 했다.
돋보이는 것은 전라도 유배시절 문집인 '성소부부고’에서의 기록처럼 선생은 철저히 위민관(爲民觀)과 평등관으로 일관했다는 것. 선생은 백성을 호랑이로 비유해 임금이 무도하면 쫓아낸다고 주장, 왕은 백성의 특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다스림을 펼쳐야하며 이 세상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라는 호민론(豪民論)을 강조하는 등 정치․개혁사상가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선생의 사상적 행적에 대해서 선생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20년전 병란을 예언하고 그 대비책과 바른 피난길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고, 중국사신으로 갔을 때 천주교 서적을 가져와 천주교를 소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선생은 서로간의 상소와 논쟁이 가속화되고 있는 시점 광해10년(1618년) 4월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선생을 역적으로 치부하는 계를 올렸고, 이에 선생은 폭정에 항거해 하인준, 김개, 김우성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나 그해 8월 24일 그의 심복들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에는 광해9년(1617년)에는 선생과 관련된 상황을 33건을 언급하고 있고, 광해10년(1618년)에는 무려 185건이나 등재돼 있을만큼 선생이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는 때의 급박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선생은 사회제도의 모순과 정치적 부패상을 질타하고 정치사회개혁을 주창하는 등 실천적 삶을 살다가 정치적 음해로 인해 목숨을 잃기까지 개혁적인 정치사상가, 국방이론가, 진보적 종교가, 문학가 등 수식어에 걸맞은 인물로 후대에 모범을 보이는 인물로 연구할 과제가 남아있다.
張正龍 강릉대 국문학과 교수는 평전을 통해서 "원본이 발견되지 않아 그 동안의 연구는 이본을 중심으로 한 서지적연구, 작자의 진위에 대한 연구, 수호전 등의 비교문화적 연구중심으로 진행돼 근래 민속학, 사회학, 심리학, 문화전파학의 측면에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李揆大 강릉대 사학과 교수는 "강릉과 허균은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강릉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문헌을 통해 검증하고 교산의 사상을 새롭게 승화시키고 선생의 역사속의 지혜를 현재와 어떻게 접목시켜야 할 지 논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강릉시와 허균․허난설헌 선양사업회에서는 매년 허균․허난설헌 문화제를 통해 국제심포지엄 등 학술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있고, 향후 전국적인 선양사업으로 확대하기 전국규모의 백일장 등의 행사도 추진하고 있다. 또 강원의 얼선양사업으로 강릉시 초당동 생가 터에 자리하게 될 허균․허난설헌자료관 건립도 내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朴賢哲
1916년 전주서 발견된 홍길동전 목판본
'끊임없이 탐구하는 학자 참 모습'
교산(蛟山) 허균(許筠)은 조선 선조 2년에 태어나 광해군 10년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나라 안에서는 임진왜란을 치른 뒤에 봉건체제가 뿌리부터 뒤흔들려 새로운 개편의 움직임이 나타났고 선조때에 시작된 당쟁은 더욱 굳어져 파당을 이루었다. 이런 속에서 광해군이 나타나 많은 마찰을 일으켰던 시대에 선생은 활동했다.
명문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유교와 문장을 숭상하던 사회에서 유교적인 학식이 뛰어났으며, 글 잘하는 문사로 칭송을 받았다. 언문으로 천대받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맨 처음 쓴 인물로 한국문학사에서 그의 생애나 문학의 배경 등이 연구되고 있다.
선생은 당시의 사회에서는 경망스럽다는 핀잔을 받았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오히려 끊임없는 학문의 욕구를 지닌 정직한 지성인의 모습으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학문이나 문학이 획일화 된 당시 사회에서 여러 사상을 포용하는 넓은 안목과 다양성을 추구하고 저마다 지닌 가치를 부여하려 한 선생의 의지를 탐구하는 것이 선양사업의 중요한 몫이라고 하겠다.
붕당의 희생물로 역적이라는 이름으로 비명에 간 허균. 적어도 근대사회 이전에는 막된 인물로 평가를 받으면서도 글재주만은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했다. 하지만 선생이 역사 속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홍길동전’을 쓰고 그 글에 담긴 정치와 학문의 획일성에 반기를 든 다양한 사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백성을 생각했던 사상과 그의 행동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거울로 비춰보려는 것이 곧 선양의 큰 의미일 것이다.
허난설헌 생애의 서술적 정리
허난설헌(許蘭雪軒)은 1563년(명종 18년)에 태어나서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 27세로 사망했다. 난설헌이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 발발)이 일어나기 직전의 조선 중기로서 당시 조선의 정세는, 정치적으론 연산군 이후 명종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세력간의 정쟁으로 인한 중앙정계의 혼란, 선조 즉위 이후 사림세력의 득세로 인하여 격화된 붕당정치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난설헌의 본관은 양천(陽川) 허씨, 이름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다. 초희라는 이름은 장성해서까지 사용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번이라는 자는 난설헌 자신이 중국에서 옛부터 전해져온 여선(女仙)인 번부인(樊夫人)을 사모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난설헌이라는 호의 유래는 직접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고 다만 난초(蘭)의 이미지와 눈(雪)의 이미지에서 지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난설헌은 강릉(옛 지명은 임영(臨瀛)) 초당리에서 아버지 허엽(許曄)과 어머니 김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허엽(1517 - 1580)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후에 경상감사를 역임하였고 동서분당 때 동인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난설헌의 어머니는 허엽의 둘째 부인이었으며 허엽은 첫째 부인인 한씨부인과의 사이에 두 딸과 아들 성(筬)을 두었고 김씨부인과의 사이에는 봉([竹封]), 난설헌(許蘭雪軒), 허균(許筠)의 2남 1녀를 두었다. 허엽은 난설헌 18세 때 상주에서 객사했다.
난설헌보다 15세 위였던 큰오빠 허성(許筬, 1548 - 1612)은 호가 악록(岳麓)이고 이조․병조판서까지 지냈다. 작은오빠 허봉(許봉, 1551 - 1588)은 호가 하곡(荷谷)이고 자가 미숙(美叔)인데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강직한 성격으로 임금에게 직언을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허봉은 1583년, 난설헌 21세 때 율곡 이이의 잘못을 탄핵하다가 귀양 갔다가 3년 후 방면되지만 불우하게 지내다가 술에 의해 몸을 망쳐서 난설헌 26세 때 객사했다. 그는 난설헌보다 12세 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난설헌의 재능을 아껴주었다.
그리고 동생 허균(許筠, 1569 - 1618)은 난설헌보다 여섯 살 아래로서 호는 교산(蛟山)이고 형조․예조판서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아주 총명하고 지식이 막힘이 없었으며 개혁의식이 뚜렷했다. 허균은 봉건적 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자이며, 후일 혁명을 준비하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50세에 처형당했다.
허난설헌 그림:《앙간비금도》
l 22.2x12.0cm * 종이에 채색 * 허엽의 12대 종손 소장
("조선시대 여성화가에 대한 소고", 김선희, http://www.femiart.co.kr/gallery/t-history1c.asp)
"허난설헌의 「앙간비금도」는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소녀가 그림 속의 인물로 등장하는
첫 그림으로 보여진다. 임란 전 조선중기까지의 그림이 중국의 고사인물도나 우리의 산수가
아닌 화보풍의 산수를 그린 데 비해 허난설헌의 「앙간비금도」는 주변의 실경이 등장하는
경우로 조선후기 진경산수와 풍속화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봉, 난설헌, 균은 모두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모두 불행하게 죽었다.
난설헌의 집안은 아버지와 자녀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 불렀다. 허엽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화담 서경덕 등에게 문장을 배웠다.
난설헌은 작은오빠 봉, 동생 균과 같이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서울 건천동에서 장성했고 결혼 생활도 서울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건천동은 김종서, 정인지, 이순신, 유성룡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라 한다. 난설헌은 문장을 집안에서 배웠다. 일찍부터 글을 깨우쳤고 도교의 신선세계에 대해 배웠다.
난설헌은 특히 태평광기(太平廣記; 중국 송(宋)나라 학자 이방 등이 편찬한 설화집. 신선, 도술 등의 이야기가 많이 나옴.)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난설헌은 8세 때인 1570년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그것은 신선 이야기에 나오는 달(月)의 광한전에 백옥루를 새로 짓는다고 상상하고 그 건물의 상량문을 쓴 것이었다.
난설헌의 글재주는 허균과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허균 자신도 글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어릴 적에 시를 써서 누나인 난설헌에게 보였다. 그 시의 내용에 '여인이 흔들어 그네를 밀어 보낸다.' (女娘료亂送秋千) (*다스릴 료)란 시구가 있었다. 이를 보고 난설헌이 '잘 지었다. 다만 한 구가 잘못되었구나.'라고 말했다. 균이 '어떤 구가 잘못되었는가?' 하고 물으니 난설헌이 곧 다음과 같이 고쳐 주었다.
'문 앞에는 아직도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 있는데,
백마를 타고 황금 채찍을 하면서 가버렸다.'
(門前還有斷腸人, 白馬半拖黃金鞭)
난설헌의 시들은 도교적인 측면과 당나라 시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것들이 많다.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화담 서경덕에게 배웠는데 이것도 난설헌이 도교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드는데 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작은오빠 하곡 허봉은 난설헌보다 12세나 위였기 때문에 난설헌의 어린 시절에 충분히 그녀를 가르쳐 줄 위치에 있었다.
봉은 자기의 글벗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글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달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는데 서얼로 태어났기에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상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고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틀에 박히지 않은 당시 풍의 글을 썼다. 난설헌은 이달에게서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당나라 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난설헌은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14세나 15세에 시집을 갔다. 남편은 안동김씨 집안의 김성립(金誠立)이었다. 그의 집안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김성립은 허난설헌보다 한 살 위였고, 자는 여견(汝見)․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문장을 했지만 난설헌의 경지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던 것 같다. 그의 처남이었던 허균은 그를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글을 잘 짓는 자"라고 평했다. 즉,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하는데 과문(科文; 과거(科擧)의 문장)은 우수하였다 한다.
그는 외모가 잘 생기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 공부에도 그다지 뜻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1589년(선조 22), 즉 난설헌이 죽던 해, 자기 나이 28세가 되어서야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후처로 남양홍씨(南陽洪氏)를 맞아들였다. 난설헌이 죽고 3년 후인 그의 나이 3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으로 싸우다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벼슬은 정9품의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었다. 시체를 찾지 못해 의복으로만 장례를 치루었다. 그는 자식이 없이 죽어서 집안에서 양자를 들였다.
난설헌의 외모는 뛰어났고(佳人; 이덕무 청장관전서), 성품도 어질었다(賢; 허균의 학산초담)고 한다. 난설헌은 아주 많은 책을 읽었고, 아주 많은 작품을 썼다. 글을 쓸 때에도 생각이 마치 샘솟듯 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허부인난설헌집 부경란집)
허난설헌 서필
(크기: 22.5 x 22.5 cm; 출처: '허난설헌연구', 허미자)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부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고부간 갈등도 심했던 것 같다. 부부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얘기들이 전해온다.
남편 김성립이 접(接: 글방 학생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에 독서하러 갔다. 난설헌은 남편에게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 (古之接有才, 今之接無才)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즉 파자를 사용해서 지금의 접은 接에서 才자가 빠진 妾(여자)만 남아있다고 하며 방탕하게 노는 것을 꾸짖었던 것이다.
다른 얘기에는 김성립과 친구들이 집을 얻어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 김성립의 친구가 거짓으로 '김성립이 기생집서 놀고 있다'고 했다. 난설헌이 이를 전해 듣고는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시를 한 구절 써서 보냈다.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래 이간질을 시키는가?" (郎君自是無心者, 同接何人縱半間)
이를 보고 사람들은 난설헌이 시에도 능하고 기백도 호방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성립은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난설헌을 멀리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고 또 역설적으로 평소 기생집에서 놀았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1579년 5월(난설헌 17세)에 아버지 허엽이 경상감사가 되어 내려갔다. 다음해인 1580년 2월(난설헌 18세),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사망했다. 이때부터 허씨 집안이 기울기 시작한다.
작은오빠 허봉은 시집간 누이동생인 난설헌을 아껴서 시도 지어 보내고 붓도 선물하였다. 난설헌의 글재주를 아끼는 마음과 형제애를 느낄 수 있는 사건이다. 특히 1582년(난설헌 20세)에는 허봉이 난설헌에게 "두율(杜律)" 시집을 보내 주면서 "내가 열심히 권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으면 희미해져 가는 두보의 소리가 누이의 손에서 다시 나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써주었다. 강직한 성격의 허봉은 1583년(난설헌 21세)에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1585년 봄 (난설헌 23세), 상을 당해 외삼촌댁에 머물렀는데 이때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를 지었다. 이 해에 허봉이 방면되지만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1588년 9월(난설헌 26세), 금강산에 있던 작은오빠 허봉이 황달과 폐병으로, 향년 38세의 나이로 객사를 한다. 난설헌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는데 아들의 이름이 희윤(喜胤)이었다. 그러나 딸을 먼저 잃고 다음 해에 아들을 잃었다. 이들이 태어나고 죽은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희윤의 묘비명을 허봉이 지어준 것을 보면 모두 허봉이 귀양(난설헌 21세 때) 가기 전의 일들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난설헌은 몰락해 가는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식을 잃은 아픔, 부부간의 우애가 좋지 못함과 고부간의 갈등, 그리고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 등등을 창작으로 승화시켰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항상 화관(花冠)을 쓰고 향안(香案: 향로나 향합 따위를 올려놓는 상)과 마주앉아 시사(詩詞)를 지었다고 한다. (이능화(李能和),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자신의 세계에서 이미 신선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난설헌이 지은 시와 문장이 집 한 간에 가득 찼다고 한다.
난설헌의 죽음은 신비롭다. 허균의 《학산초담》과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二旬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난설헌이 일찌기 꿈에 월궁(月宮)에 이르렀더니, 월황(月皇)이 운(韻)을 부르며 시를 지으라 하므로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허경진 역)
(碧海浸瑤 靑鸞倚彩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묵조도》/ 허난설헌
(출처: '한국여류한시문선', 김지용, 대양서적, 1973.)
라고 하였고, 꿈에서 깨어난 뒤 그 경치가 낱낱이 상상되므로 "몽유기(夢遊記)"를 지었다.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今年乃三九之數, 今日霜墮紅)
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3․9는 27이라, 난설헌이 세상에 살다 간세월과 같다.
난설헌은 그렇게 1589년 3월 19일, 향년 27세로 요절했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다비(茶毗: 불교용어로 불태우는 것. 화장.)에 부치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 정리: 류주환
"홍길동전은 부안 우반동에서 쓰여졌다"
홍길동전 (洪吉童傳)
홍길동전은 허균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졌다. 홍길동전이 허균의 작품이냐 아니면 작자 미상이냐를 가지고 말도 많다. 그러나 홍길동전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허균이 아니면 감히 쓸 수 없는 작품이라 생각든다.
임진왜란 전후 시기의 사회적 혼란을 체험 목격하면서 암울한 시대적 환경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염원하였던 애틋한 소망이 홍길동전에 그대로 기술되어 있다.
홍길동전은 당시 시대적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허균과 같은 위대한 문장가였기에 홍길동전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홍길동전의 리얼리티는 그가 태어난 가문과 성장과정 그리고 파란만장한 관직생활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작자로서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허균(1569-1618)은 경상감사 허엽의 3남2녀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렴결백한 선비로서 왕에게 직언하는 충신이었다. 허균은 둘째 형 허봉과 누이 난설헌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누이 난설헌은 27세에 요절하였지만 타고난 탈속적 성품으로 가정 생활을 원만하게 유지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부부관계와 고부간 사이도 평탄하지만은 안했다. 허난설헌과 허봉의 세속을 초탈한 仙風을 지니고 있었다. 허균은 난설헌의 도선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허균은 21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6살에 대과(문과중시)에 합격한다. 허균의 관직생활은 29세에 시작되었다.
막내둥이로 자란 허균은 관직 생활에서도 그런 관행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문장력이 탁월한데다가 자유분방한 생활을 누리는 허균에게 시기와 질투가 항상 따랐다. 예의범절과 염치가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혀 그는 항상 사간원의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관직과 야인생활을 넘나드는 인생역정을 겪었다.
그의 글재주는 9살 때부터 시를 지어 어려서부터 문학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허균은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면서 다른 관리들의 탄핵을 받았다. 허균은 선조 39년 중국사신단을 맞이하는 종사관으로 선임되었다.
중국의 사신은 주지번과 양유년이었다. 주지번은 명망높은 중국의 3문사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에서도 고민 끝에 주지번을 접대하는 카운터 파트너로서 허균을 내세운 것이다. 당시 사대주의 사상이 뿌리깊은 조중관계에서 허균에게 주지번의 만남은 커다란 영광이었다.
재능이 뛰어난 허균은 그에게 주어진 황금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허균은 경치 좋은 곳에서 향연을 베풀면서 중국의 유명한 시문과 국내의 유명한 시문을 줄줄 읊어내고 중국 고서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결과적으로 주지번은 허균의 박식과 재능에 감탄하였고 허균 같은 인물이 조선에 있고 조선의 문학적 능력이 우수하다는 알리는 기회였다. 허균은 그만큼 학문에 막힘이 없었고 당당하였으며 시문에는 당할 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고서뿐만 아니라 불교, 선교 등에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허균의 선풍과 불교의 관심은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거침이 없었다.
허균은 유학자이지만 불교를 숭상하고 식사시에 경음을 외고 불상을 모셔놓고 검정 옷을 입으며 염주를 목에 걸고서 절을 하면서 염불하는 것을 서슴없이 하였다. 결코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이 불제자라고 떠벌리고 다녔으며 불교와 도교에도 심취하고 있었다.
그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와도 교분을 갖었으며 불자로서 행세를 하여 수차례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불교를 단념하지 않았다. 그가 세속을 떠나 유랑하는 생활에 재미를 갖게된 것도 선불의식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가 홍길동전을 쓰게된것도 이러한 사상적 소양을 갖지 않았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가 도불적 관념을 갖게된 것은 어려서부터 집안의 형과 누나의 영향을 받은 게 직접적인 요인이었겠지만 실질적으로 도불의 영향을 받은 계기는 부안 내변산에 들어와 생활하면서 감응을 받은게 아닌가 한다.
선조 40년(허균의 나이 40세)에 공주목사에 부임하였다가 그 이듬해 암행어사의 주청에 따라 파직당하고 부안으로 낙향하여 전답과 가택을 마련하고 은거생활을 시작하였다. 허균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관직을 가졌으나 과거시험 부정사건으로 파직 당하고 광해군 2년에 전북 함열로 귀양살이를 온다. 함열현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1년여만에 방면되었으나 다시 그 이듬해에 부안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살았다. 부안에 어떤 매력을 느꼈기에 그리 즐겨 찾았을까?
부안에는 그와 대화의 상대가 되는 기생 매창이 있었다. 매창은 비록 기생의 몸이었지만 시문에 뛰어난 소양을 갖고 있었다. 허균이 부안을 자주 ?아온 것도 매창의 시문에서 묻어나는 정서를 허균이 좋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매창의 시에는 불교와 선풍이 깊게 베어있다. 이러한 매창의 선불적 정서를 허균이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매창의 시문에 빠져들면서 닷새동안 밤낮으로 함께 지낸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허균과 매창은 몸을 섞지 아니하였다. 서로 시문과 정서를 좋아했기에 사악한 마음을 가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허균이 떠난 뒤 매창은 허균과 염분설이 퍼지자 문을 걸어 잠그고 세속을 등진 채 천층암이라는 암자로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매창이 머무는 천층암은 과연 어디일까. 그의 登千層庵의 시구를 보면 내변산에 위치한 천년묵은 사찰의 암자로 보인다. 천층암이란 명칭에서 천길 높은 암벽 위에 세워진 암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시구에 어수대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仙溪山 자락에 이었던 암자로 보인다.
허균이 부안에 와서 머물렀다는 정사암도 선계산에 있었다. 선계산에는 크고 작은 폐사지가 발견되고 있어서 매창이 머문 천층암이나 허균이 머물렀다는 정사암은 근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쓴 중수정사암기를 보면 정사암 옆에 조그마한 사찰이 있었다.
허균 산문집「성소부부고」 卷 6 文部三 記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庵記)를 살펴보자.
"부안현(扶安縣) 해안에 변산이 있고, 변산 남쪽에 계곡이 있는데 우반이라 한다. 그 고을 출신 부사 김공청이 그 빼어난 곳을 택하여 암자를 짓고 정사라 이름지어 노년에 즐겨 휴식하는 곳으로 삼았다. 나는 일찍이 사명을 받들어 호남을 왕래하였는데, 그 경치에 대해 소문은 많이 들었으되 미처 보진 못했었다.
나는 본시 영예나 이익을 좋아하지 않아, 매양 상자평(尙子平)의 뜻을 지녔으나 그 소원은 아직 이루지 못했었다. 금년에 공주에서 파직 당하자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서 장차 소위 우반이라는 곳에 집을 짓고 살 결심을 하였다.
김공의 아들 진사(進士) 등(登)이란 자가 '우리 선군(先君)의 폐려(弊廬)가 있으나 저는 지킬 수가 없으니 공이 수리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고군달부(高君達夫) 및 두 李씨와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서 보았다.
해변을 따라서 좁다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서 골짜기에 들어서니 시내가 있어 그 물소리가 옥 부딪는 듯하여 졸졸 수풀속으로 흘러 나왔다. 시내를 따라 몇리 안 가서 산이 열리고 육지가 트였는데, 좌우 가파른 봉우리는 마치 봉황과 새가 나는 듯 높이를 헤아리기 어려웠고 동쪽 산기슭에는 소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르듯 서 있었다.
나는 세 사람과 함께 곧장 거처할 곳으로 나아가니, 동서로 언덕이 셋 있는데 가운데가 가장 반반하게 감아 돌고 대나무 수백 그루가 있어 울창하고 푸르러 상기도 인가의 폐허임을 알 수 있었다.
남으로는 드넓은 大海가 바라보이는데 금수도(金水島)가 그 가운데 있으니, 서쪽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西林寺가 있는데 승려 몇이 살고 있었다. 계곡 동쪽을 거슬러 올라가서 예 사당나무를 지나 소위 정사암이란 데에 이르니 암자는 방이 겨우 네칸이며 바위 언덕에다 지어 놓았는데, 앞에는 맑은 못이 굽어보이고, 세 봉오리가 높이 마주 서 있었다.
나는 폭포가 푸른 절벽에 쏟아져 흰 무지개처럼 성대하였다. 시내로 내려와 물을 마시며, 우리 네 사람은 산발하고 옷을 풀어 해친 채 못가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가을 꽃이 활짝 피고 단풍은 반쯤 붉었는데 석양이 산봉우리에 비치고 하늘 그림자는 물에 거꾸로 비추인다.
굽어보고 쳐다보며 시를 읊조리니 금새 티끌 세상을 벗어난 느낌이여서 마치 안기생(安期生)과 선문자와 함께 삼도(三島)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얻어 이 몸을 편케 할 수 있으니 하늘이 나에 대한 보답도 역시 풍성하다고 여겼다.
소위 관직이 무슨 물건이기에 사람을 감히 조롱한단 말인가. 고을 원인 심군덕현(沈君德顯)이 암자가 피폐하되 보호하는 이가 없음을 보고 승려 세사람을 모집하여 쌀과 소금 약간 섬을 더해주고 목재를 베어 수리하게 한 뒤 관역을(官役)을 바꾸어 거기에 머물러 지킬 것을 책임지웠다. 암자는 이로 말미암아 복구되었다.
중수정사암기를 살펴보면, 선계폭포가 있고 그 아래로 시냇물이 흘렀으며 남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대나무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서림사가 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허균이 머문 정사암은 현재 부안 우반동의 선계폭포 위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사암의 위치는 선계폭포 위쪽을 비정하고 있으며 중수정사암기의 자연환경을 놓고 볼 때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정사암지 아래 선계폭포 골짜기에 도적굴이 있다.
도적굴은 구전으로 전해오는 곳이지만 임진왜란 이후 먹고살기 힘든 유민들이 세상을 등지고 이곳에 모여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불순한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은 고향을 등지고 유랑생활을 떠났으며 먹고 살기 위해 도적질을 서슴치 않았다.
말이 도적질이지 굶주림을 이겨내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최후의 선택이었다. 그러한 참담한 시절은 허균은 그들의 생활상을 목격하면서 살았다.
조선후기 우리나라 떼도적들의 3대 웅거지는 금강산․월출산․변산이었다. 변산반도에 도적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전후기부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허균은 종종 부안에 들렀을 때 도적들의 생활상을 겪으면서 새로운 세상의 이상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도적들은 거지근성의 도적이 아니라 암담한 현실의 개혁을 주창하는 민중들이었다. 굶주림을 극복하고 풍요로운 나라 율도국이라는 이상국가를 실현하여 백성들이 모여 결사조직처럼 취당형태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이 취당이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활빈당이다.
홍길동은 활빈당의 대장이었고 허균은 자기자신이 홍길동가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의적 홍길동은 부자들의 재물을 훔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분배해주고 싶었던 것도 변산반도의 도적들을 보았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또한 홍길동전은 서자와 기생을 등장시켜 적서 차별과 신분 차별을 내세우면서 가정의 갈등이 곧 사회적 갈등이라는 현실을 직시한 것으로 사회개혁과 신분해체를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어찌보면 허균은 당시 자신의 생애 담과 현실적 상황을 구조적으로 결합시켜 홍길동전을 만들어 낸게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기생 매창과 도적들과 접하고 바다가운데에 있는 금수도라는 섬을 보면서 살았을 부안 우반동 정사암에서 홍길동전을 저술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홍길동전의 무대로서 부안 우반동이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며 허균이 정사암에 머물면서 집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홍길동전의 무대였던 우반동에 반계 유형원 선생이 자리를 잡고 반계수록을 집필하였다. 왜 하필이면 유형원은 우반동으로 20여년간 농사를 짓고 살았을까. 우반동 골짜기는 꽤나 넓은 들이 조성되어 있다. 그곳은 부안 김씨의 세거지이기도 하지만 최후의 피난처로 선택한 유민도적들이 웅거지이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민들의 생활상을 몸소 체험하면서 임상실험의 결과를 이론적으로 정리한 게 반계수록이 아닌가 한다. 반계수록은 실학사상의 효시를 이루는데, 만약 벽혁의 기운이 감도는 우반동이 아니었다면 그러한 개혁이론이 정리될 수 있었을까 한다.
허균이 홍길동전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하였던 그곳에서 반계 유형원은 제도적 논리로 사회변혁을 추진할려고 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전라북도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전문학의 중심지요 발상지라 할 수 있다. 좌도권에 속하는 운봉 남원지역은 흥부전, 춘향전의 배경 무대라 할 수 있고 우도권에 속하는 부안 내변산은 홍길동전과 허생전의 배경무대가 되고 있다.
흥부전은 서민들이 경제적 부의 성취가 현실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희망과 대박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시대적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라면, 춘향전은 기생의 딸 춘향과 과거급제한 관리 이도령의 상대적 인물 설정을 하여 하극상을 통하여 양반관리들의 허구성을 고발하고 신분제 해체이후 신분평등과 여성해방의 기치를 내건 풍자소설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홍길동전과 허생전은 도적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사회변혁을 추구하고 이상향의 세계를 추구하는 당취들로 묘사하여 그들만의 이상국가를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구현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허균(許筠)과 차와인연
-글그림, 담원-
나는 그대를 사랑하여 막역하게 사귀였다.
오랫동안 정을 나누며 그의 죽음을 듣고
서러운 눈물을 한바탕 흘리고 애도 한다고 허균이 쓰고있다.
이글은 조선조의 이방인과 ,풍운아로 잘알려진 허균의 사랑 이야기이다.
요절한 매창(梅窓)이라는 여인을 통해 허균은 조선조 여류시인이였던 죽은 누이 난설(蘭雪)과
일찍 세상을 떠난 부인을 그리워하며 詩한수를 남긴다.
이화우(梨花雨)흩날릴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
춘풍낙엽 (春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꿈만 오락가락 하여라.
이처럼 詩나 茶를 이야기 할 때 허균은 여유가 없었다.
허나 짧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차 한잔에 몰입을 할 수 있었다 한다.
차가 있어 한잔 차에 몰입하여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이 탄생해 민족문화의 길잡이가 되였다.
허균의 발자취가 담긴 부안현 변산반도를 몇일전 기행하게되었다 .
인근 개암사를 찾고, 허균의 누실을 찾아가는 경치를 따라
선계폭포에서 내작은 찻짐을 풀어놓고 폭포수로 차한잔 달여 마신다.
곳 있을 梅雨를 그리워하며 찾은날... 차와 불교의 성지 변산,
예부터 유서 깊은 작설차의 고장, 그리고 부안 도요, 오늘 이렇게 허균과 함께한 차 한잔의 인연이다.
유회(有懷):회포 / 허균(許筠)
倦鳥何時集(권조하시집) 지친 새는 어느 때 모여들까?
孤雲且未還(고운차미환) 외로운 구름은 또한 돌아오지 않느니.
浮名生白髮(부명생백발) 뜬 이름에 백발은 생겨나고
歸計負靑山(귀계부청산)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청산을 저버렸네.
日月消穿榻(일월소천탑) 오랜 세월 의자가 뚫어지게 앉아 보내고
乾坤入抱關(건곤입포관) 넓은 세상 문지기로 들어 있네.
新詩不縛律(신시불박률) 새로운 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니
且以解愁顔(차이해수안) 이로써 또한 근심스런 얼굴 펴노라.
陋室銘 許均
房闊十笏 南開二戶 午日來烘 旣明且煦 家雖立壁 書則四部 餘一犢鼻 唯文君伍 酌茶半? 燒香一炷 偃仰栖遲 乾坤今古 人謂陋室 陋不可處 我則視之 淸都玉府 心安身便 孰謂之陋 吾所陋者 身名竝朽 廬也編蓬 潛亦還堵 君子居之 何陋之有
방의 넓이는 10홀, 남으로 외짝문 두 개 열렸다. 초가삼간. 누옥의 구체적 묘사
한낮의 해 쬐어, 밝고도 따사로워라. 자연 환경의 쾌적함
집은 겨우 벽만 세웠지만, 온갖 책 갖추었다. 家徒四壁(가도사벽) 물질(가난)↔정신(선비의 자긍심)
쇠코잠방이로 넉넉하니, 탁문군(卓文君)의 짝일세. 적빈(赤貧) 속의 여유
차 반 사발 따르고, 향 한 대 피운다. 기품과 여유있는 생활
한가롭게 숨어살며, 천지와 고금을 살핀다. 세속을 잊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
사람들은 누추한 방이라 말하면서, 누추하여 거처할 수 없다 하네. 외부의 시선(평가)
내가 보기엔, 신선이 사는 곳이라, 마음 안온하고 몸 편안하니, 화자의 인식(반론)
누추하다 뉘 말하는가. 외부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의지
내가 누추하게 여기는 건, 몸과 명예가 모두 썩는 것. 입신양명 추구의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
집이야 쑥대로 엮은 거지만, 도연명도 좁은 방에서 살았지. 선인(先人)을 통한 교훈
군자가 산다면, 누추한 게 무슨 대수랴. 대범하고 호탕한 삶의 자세 표현
-허균(1569~1618)의 ‘누추한 내 방’(陋室銘, 김풍기 옮김)
작은 방에 남쪽으로 문을 내었고
한낮 볕 쪼여 밝고도 따사롭네
벽 뿐인 집이지만 책으로 둘러 싼 방
베잠방이 걸친 이 몸 탁문군(卓文君)의 짝이라네
차 반 사발 따르고 향 한 자루 사르며
한가로이 뒹굴며 천지고금을 생각하노라
남들은 누추해서 어찌 사노라지만
내가 보기엔 신선(神仙)의 세상인 것을
몸과 마음이 편하거늘 그 누가 누추하다 말하리
내가 누추하게 여김은 몸과 이름이 함께 썩는 것
다북쑥이 우거져 집을 덮는다 해도
군자가 머물러 산다면 어찌 누추하리요
남쪽으로 두 개의 창문이 있는 손바닥만한 방 안
한낮의 햇볕 내려 쪼이니 밝고도 따뜻하다.
집에 벽은 있으나 책만 그득하고
낡은 베잠방이 하나 걸친 이 몸
예전 술심부름하던 선비와 짝이 되었네.
『차 반 사발 마시고 향 한가치 피워 두고
벼슬 버리고 묻혀 살며 천지 고금을 마음대로 넘나든다.
사람들은 누추한 방에서 어떻게 사나 하지만
내 둘러보니 신선 사는 곳이 바로 여기로다.』
마음과 몸 편안한데 누가 더럽다 하는가.
참으로 더러운 것은 몸과 명예가 썩어 버린 것
옛 현인도 지게문을 쑥대로 엮어 살았고
옛 시인도 떼담집에서 살았다네.
군자가 사는 곳을 어찌 누추하다 하는가. <법정>
방 넓이는 손바닥만 하고
남쪽으로 두 문이 열렸네.
집은 비록 바람벽을 둘렀을 뿐이나
서적은 四部書를 쌓았네.
남은 것은 쇠코잠방이 하나에다
사랑하는 文君이 옆에 있네.
차를 반 항아리 달이고
향 한자루 피웠네.
벼슬에서 물러나
乾坤 古今을 가늠하노니.
사람들은 누실이라 하여
살지 못하리라 하건만
나에게는 신선의 세계인 것을.
몸과 마음이 편하니
어찌 누스럽다 하리요.
내가 누스럽게 여기는 것은
몸이나 이름이 아울러 썩는 것
혹시 다부쑥이 우거져
우거하는 집이 파묻힌다 해도
군자가 이에 머물러 사니
어찌 누추하다 하리요.
哀 桂娘(梅窓) - 매창의 죽음을 슬퍼함.
妙句堪擒錦(묘구감금금) 신묘한 글 솜씨는 비단 움킨 듯
淸歌解駐雲(청가해주운) 청아한 노래 소린 구름도 잡네.
偸桃來下界(유도래하계) 천도 훔쳐 속세로 귀양 왔더니
竊藥去人群(절약거인군) 선약 훔쳐 이승을 떠나갔구나.
燈暗芙蓉帳(등암부용장) 부용꽃 장막 속엔 등불 어둡고
香殘翡翠裙(향잔비취군) 비취색 치마에는 향기 남았네.
明年小桃發(명년소도발) 내년 쯤 복사꽃이 피어날 제에
誰過薛濤墳(추과설도분) 그 누구가 설도 무덤 찾을 것인가?
凄絶班姬扇(처절반희선) 처절한 반첩여(班??)의 부채 신세요.
悲涼卓女琴(비량탁여금) 비량한 탁문군(卓文君)의 거문고일세.
飄花空積恨(표화공적한) 나는 꽃은 속절없이 한을 쌓으며
衰蕙只傷心(쇠혜지상심) 시든 난초 다만 마음 상할 뿐이네.
蓬島雲無迹(봉도운무적) 봉래섬에 구름은 자취도 없고
滄溟月已沈(창명월기침) 한바다에 달은 하마 잠기었다오.
他年蘇小宅(타년소소택) 다른 해에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
殘柳不成陰(잔유불성음) 낡은 버들 그늘을 못 이루리라.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 허균(許筠, 1569-1618)의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藁)}에 실린 자료로,
계생(桂生)․계랑(桂娘)
등의 호를 쓰기도 하였던
부안(扶安)의 기생
매창(梅窓)에 대한 허균의 평가와
매창이 죽었을 때
허균이 슬퍼하며 지은
시 두 수를 소개하고 있다.
계생(桂生, 매창)은
부안(扶安)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亂)의 지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
매창.유희경.허균
글쓴이: 이영희 조회수 : 48 08.06.12 13:47 http://cafe.daum.net/eduhanja/1Tqo/703
부안읍의 진산인 성황산에 있는 서림 공원 입구에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매창(梅窓)의 시비가 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 시비에 적힌 시조>
이화우(梨花雨)에서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이별이
일순간 천리 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임에게로 향하고 있다.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는데
이별가로서 이보다 더한 절창(絶唱)이 또 없을 듯하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신분이 기생이었던 그에게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집적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
다음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오언절구는 이러한 경우를 당해 쓴 시이다.
醉客執羅衫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 허경진 역 -
지봉 이수광은 매창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계랑은 부안의 천한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의 소문을 듣고는,
시를 지어서 집적대었다. 계랑이 곧 그 운을 받아서 응답하였다.
平生 學食東家
(떠돌며 밥얻어 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獨愛寒梅映月斜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時人不識幽閑意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指點行人枉自多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서운해 하면서 가버렸다.
계랑은 평소에 거문고와 시에 뛰어났으므로 죽을 때에도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매창은 1590년 무렵 부안을 찾아온 시인 촌은 유희경과 만나 사귀었다.
매창도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시인으로 이름이 높던 그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촌은집>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가 젊었을 때 부안에 놀러갔었는데, 그 고을에 계생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계생은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곳까지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이 때 비로소 파계하였다.
그리고 서로 풍류로써 즐겼는데 매창도 시를 잘 지어 <매창집>을 남겼다.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贈癸娘 증계낭
유희경
曾聞南國癸娘名 증문남국계낭명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시운가사동락성
글 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금일상간진면목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각의신녀하삼청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40대 중반의 대시인 유희경과의 사랑은 18세의 매창으로 하여금
그의 시 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은 많은 시들이 전한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틈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매창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후 쓰인 그의 시들은 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恨)을 드러내고 있다.
自恨 자한
매창
春冷補寒衣 춘냉보한의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일조시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저두신수처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주루적침사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懷癸娘, 회계낭>
유희경
娘家在浪州 낭가재낭주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아가주경구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상사불상견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장단오동우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1607년 유희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매창은 그와 헤어진 뒤
10여년을 마음의 정을 주는 사람이 없이 유희경을 그리며 살았다.
그가 마음을 준 두 번째 남자는 이웃 고을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李貴)였다.
그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글재주까지 뛰어났는데 매창이 그에게
마음이 끌렸음을 보여주는 허균(1569~1618)의 기록이 있다.
허균은 1601년 6월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해운판관이 되어 호남에 내려와 부안에 들렀다.
매창이 허균을 만났을 때 이귀는 이미 파직되어 김제를 떠난 지 서너 달 뒤였다.
신축년(1601) 7월 임자(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서, 함께 얘기를 나눌 만 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었다.
--- 허균의 <조관기행> 가운데
허균은 여자 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이었다.
허균은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고,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을 그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기도 하였다.
부안에 오기 전인 1599년 황해도사(종5품)로 있을 때만 해도
서울에서 창기들을 데려다 놀면서 물의를 일으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매창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정신적인 교감만 가진 것은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똑같은 인간으로서 대우를 하였고 더구나 매창의 시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허균은 다음과 같이 매창을 보았다.
계생은 부안의 창녀라. 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허균은 이 해 12월 형조정랑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고,
이듬해에 병조정랑, 사복시정 등을 지냈으며,
1604년 수안 군수로 있던 중 파직 당했다.
당시 수안의 악명 높은 토호 이방헌이란 자를 치죄하자
그의 아들이 황해 감사에 뇌물을 써서 감사가 허균을 추궁토록 했던 것이다.
1606년에 의홍위대호군(종3품 임시벼슬)이 되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이듬해 삼척부사에 부임하였으나 부처를 섬긴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또다시 파직 당했다.
허균은 불경을 읽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하게 내세웠다.
다음은 파직의 소식을 듣고 쓴 시이다.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 온 것은
내 마음 머물 곳 없었음이어라.
여지 껏 아내를 내버리지 못했거든
고기를 금하기는 더욱 어려웠어라.
내 분수 벼슬과는 이미 멀어졌으니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할 건가.
인생은 또한 천명에 따라 사는 것
돌아가 부처 섬길 꿈이나 꾸리라.
<문파관작(聞破官作)>
파직에 이어 허균은 홍문관 월과(月課)에서 아홉 번을 연이어 장원을 하였는데
이 덕으로 12월에 정3품 공주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선조가 죽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충청도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8월에 다시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었다.
성품이 경박하고 무절제하다는 죄였다.
파직당한 허균은 부안 우반동에 있는 정사암에 와서 쉬었다.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고, 산 남쪽에 우반(愚磻)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곳 출신인 부사 김청(金淸)이
그 중 아름다운 곳을 골라 암자를 짓고는 정사암(靜思菴)이라고 이름지었다.
늘그막에 즐기며 쉴 곳을 마련해 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왕명을 받고 호남을 다니며 정사암의 아름다운 경치는 실컷 들었지만, 여지껏 구경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평소부터 영화와 이욕을 즐기지 않았는지라
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올해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어 남쪽으로 돌아갈 뜻을 정하고,
장차 우반이란 곳에 묻혀 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사에 급제한 김공의 아들이 나에게 말했다.
"저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정사암이 너무 외따로 있어, 제가 지키기 어렵습니다.
공께서 다시 수리하시고 지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뻤다.
즉시 고달부와 이재영 등을 데리고, 말고삐를 가즈런히 하여 그곳에 가보았다.
포구에서 비스듬히 나있는 작은 길을 따라서 골짜기에 들어가자
시냇물이 구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풀덤불 속으로 쏟아졌다.
시내를 따라 몇 리 들어갔더니 산이 열리고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가파른 봉우리들이 마치 학이 나는 것처럼 치솟았고,
동쪽 등성이론 수많은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었다.
--중략--
시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늙은 당나무를 지나서 정사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겨우 네 칸 남짓 되었는데, 낭떠러지 바위 위에 지어졌다.
앞으로는 맑은 연못이 내려다 보였고, 세 봉우리가 우뚝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바위벽 아래로 깊숙하게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가 뻗은 것 같았다.
--하략--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
매창은 허균을 다시 만나 함께 노닐며 그의 영향을 받아 참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12월에 정3품 승문원 판교의 교지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이 무렵 매창과 가깝게 지낸 사또가 있었는데
그가 떠난 후 고을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매창이 그를 그리며 비석 옆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山 )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두고 '매창이 눈물을 흘리며 허균을 원망했다'는 소문이 났다.
다음은 이 소식을 접한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이다.
계랑에게
계랑이 달을 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새'의 노래를 불렀다니,
어찌 그윽하고 한적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부윤의 비석 앞에서 불러 남들의 놀림거리가 되셨소.
석 자 비석 앞에서 시를 더럽혔다니, 이는 낭의 잘못이오.
그 놀림이 곧 나에게 돌아왔으니 정말 억울하외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그리움이 몹시 사무칩니다.
기유년(1609) 정월 허균
매창을 잊지 못하는 허균은 또 편지를 보냈다.
다음 편지에서 매창에 대해 연인이 아닌 진정한 친구로서의 우정을 간직한 허균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젠 진회해(秦淮海)를 아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있으리까.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기유년(1609) 9월 허균
이듬해(1610) 여름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균은 이를 슬퍼하며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이다.
哀桂娘 애계낭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 묘구토심금금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청가해주운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유도래하계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약거인군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향잔비취군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명년소도발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수과설도분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그가 죽은 후 45년 후(1655)에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로부터 다시 13년 후에 그가 지은 수 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개암사에서 간행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
시집이 나오자 하도 사람들이 이 시집을 찍어달라고 하여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나기도 했다고 전한다.
부안읍 봉덕리에 있는 매창의 묘(지방기념물 제65호)
그 후 세월이 지나 그의 비석의 글들이 이지러졌으므로
1917년에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부풍시사에서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까지는 마을의 나뭇꾼들이 서로 벌초를 해오며 무덤을 돌보았다고 한다.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 읍내에 들어와 공연을 할 때에도
그들은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고 한바탕 굿을 벌이며 시인을 기렸다.
바로 곁에는 명창 이중선의 묘가 있다.
지금도 음력 4월이면 부안 사람들은 그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의 묘는 1983년 8월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그가 간지 35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이곳을 찾아온 한 시인은
그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 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나삼상羅衫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매창뜸' 전문 이 병 기
1974년 4월 27일 매창기념사업회(회장 김태수)에서 성황산 기슭 서림공원 입구에 매창의 시비(詩碑)를 세웠다. 이 곳은 선화당 후원으로 매창이 자주 불려가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했던 곳이다.
글씨는 송지영님이 썼다
네 벗이 사는 집
허균
내가 사는 집 이름을 사우재(四友齋)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내가 벗하는 이가 셋이고 거기에 또 내가 끼니 합하여 넷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세 벗이란 것은 오늘날 생존해 있는 선비가 아니고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옛 선비들이다. 나는 원래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데다가 또 성격이 제멋대로여서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꾸짖고 떼를 지어 배척하므로, 집에는 찾아오는 이가 없고 밖에 나가도 찾아갈 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탄식했다.
“벗은 오륜(五倫)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는데 나만 홀로 벗이 없으니 어찌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벼슬길에서 물러나 생각해 보았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더럽다고 사귀려 들지 않으니 내가 어디서 벗을 찾을 것인가. 할 수 없이 옛 사람들 중에서 사귈 만한 이를 가려내서 벗으로 삼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는 진나라 처사 도연명이다. 그는 한가롭고 고요하며 작은 일에 대범하여 항상 마음이 편안했으니, 세상일 따위는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난을 편히 여기고 천명을 즐기다가 죽었다. 그의 맑은 풍모와 빼어난 절개는 아득히 높아 잡을 길이 없으니, 나는 깊이 흠모만 할 뿐, 그 경지에 미치지는 못한다.
그 다음은 당나라 한림 이태백이다. 그는 뛰어나고 호탕하여 온 세상을 좁다고 여기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귀인들을 개미 보듯 하며 스스로 자연 속에서 방랑했다. 그런 그가 부러워서 따라 가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또 그 다음은 송나라 학사 소동파이다. 그는 허심탄회하여 남과 경계를 두지 않으므로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 귀한이나 천한 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더불어 즐기니, 유하 혜가 자기의 덕을 감추고 세속을 좇는 풍모와 같은 데가 있다. 내가 본받으려 하나 아직은 그리 되지 못하고 있다.
이 세분의 군자는 문장이 천고에 떨쳐 빛나지만, 내가 보기에는 문장은 그들에게 취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내가 취하는 바는 그들의 인품에 있지, 그들의 문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 세 분 군자를 벗 삼는다 할 것 같으면 굳이 속인들과 함께 옷소매를 맞대고 어깨동무를 하며, 또 소곤소곤 귓속말을 할 것도 없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친구의 도리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나는 이정(李楨)에게 명하여 세 군자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내가 찬(贊)을 지어 한석봉에게 해서(楷書)로 쓰게 했다. 그래서 내가 머무는 곳이면 반드시 그 초상을 좌석 귀퉁이에 걸어 놓으니, 세 군자가 엄연히 서로 마주보고 품평하며 마치 함께 웃고 이야기하는 듯하고, 더욱이 그 인기척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여 쓸쓸히 지내는 나의 생활이 괴로운 줄을 거의 알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나도 비로소 오륜을 갖추었으니, 사람들과 사귀는 것은 더욱 탐탐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아, 나는 본디 글을 못하는 사람이라, 세 군자의 뛰어난 문장에도 따라가지 못한다. 게다가 성격마저 거칠고 망령되어 그런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바이다. 다만 그분들을 존경하고 사랑하여 벗으로 삼고자 하는 정성만은 귀신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런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고 하는 것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분들과 서로 일치되는 바가 있다.
도연명은 팽택의 수령이 되어 80일 만에 관직을 그만두었고, 나는 세 번이나 이천 석을 받는 태수가 되었으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번번이 배척받아 쫓겨나고 말았다. 적선(謫仙) 이백은 심양과 야랑으로 귀양 가고, 소동파는 대옥과 황강으로 귀양 갔으니, 이는 모두 어진 이가 겪은 불해이었다. 그런데 나는 죄를 얻어 형틀에 묶여 곤장을 맞은 뒤 남쪽으로 귀양을 갔었으니, 아마도 조물주가 장난을 쳐서 그들과 같은 고통만은 맛보게 하면서도 주어진 재주와 성품만은 갑자기 바꿀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하늘의 복을 받아 전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으니, 관동 지방은 나의 옛 터전으로, 그 경치며 풍물이 중국의 시상산, 채석강과 견줄 만하고, 백성은 근실하고 땅은 비옥하여 또한 중국의 상숙현과 양선현보다 못지않으니, 마땅히 세 분 군자를 모시고 벼슬을 모두 버리고 경포 호숫가로 돌아간다면, 어찌 인간 세상에 한 가지 즐거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저 세 분 군자가 안다면 역시 즐겁고 유쾌하게 생각하실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은 한적하고 왜져서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으며, 오동나무가 뜰에 그늘을 드리우고 떨기로 난 대나무와 들매화가 집 뒤에 줄지어 심어져 있으니, 그 그윽하고 고요함은 꽤 즐길 만하다. 그런 중에 북쪽 창에다 세 군자의 초상을 펴놓고 분향하고 읍을 하는 생활을 한다. 이에 편액을 사우재라 하고, 그 연유를 위가 같이 기록해 둔다. 신해년(1611년) 2월 사일(社日)에 쓰다.
허균, 최후의 19일
허균이 아들 굉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처음에는 애비의 인생을 찬찬히 반추할 생각이었으나 그만두는 편이 낫겠다. 애비의 인생은 애비의 인생이고, 너는 또 너만의 인생을 걸어가야 하니까. 애비는 네가 부끄러워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너도 인생을 살다보면 참으로 고마운 이들을 많이 만날 게다. 훌륭한 스승, 따뜻한 이웃, 믿음직한 벗, 아내 그리고 자식들...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그들을 위해서라면 너의 모든 것을 주고서도 아깝지 않아야 한다. 네 인생의 주인이 네 자신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너의 인생은 네가 만난 사람들, 네가 읽은 책, 네가 본 사물과 풍광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게다. 그리고 너 역시 그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고.
굉아!
아직도 너와 함께 의금옥을 탈출하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느냐?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당연히 너와 동행했겠지. 허나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만큼이나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법이다. 후일을 기약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 묻고도 싶겠지. 허나 세상을 바꿀 기회는 평생 한 번도 찾아오기 힘들다. 5년이나 벼르고 별렀지만 준비가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허나 결코 무모한 건 아니었다. 이런 기회는 준비가 완벽해지기를 기다려 찾아오는 게 아니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준비 부족을 하나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그 것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애비가 이번 일에 실패했더라도 결코 인생에서 패배한 것은 아니란 걸 알아주기 바란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최선을 다하고서도 실패하는 것 역시 인생이란 걸 깨달을 날이 올 게다. 설령 내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감옥에서 달아나더라도, 조선 팔도에 역적의 괴수로 알려진 다음에댜 어찌 또 다른 거사를 준비할 수 있겠느냐. 그런 때가 또 온다면 그건 나의 몫이 아닐 게다. 애비는 오늘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들을 끝까지 실망시키고 싶지 않구나. 나의 죽음이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으면... 어린 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는구나. 삶이란 어차피 고행일 따름이니 잘 참고 견디거라. 앞으로 나아가기를 게을리 말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책을 읽고 새로운 글을 쓰도록 하려무나. 끝까지 너의 걸음걸이를 지켜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