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왕유의시

金浩 2008. 8. 28. 10:00

 

시불(詩佛)이라 불리는 王維 왕유
2006/07/20 오 전 9:57 | 기본폴더

왕유(王維)는 중국문학상 당대를 대표하는 대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청,여증은 「이백(李白)은 천재, 두보(杜甫)는 지재, 왕유(王維)는 인재」라고 하였고, 청,왕사신은 《당현삼미집唐賢三味集》에서 왕유(王維)를 시불(詩佛)이라 일컬어 시선 이백과 시성 두보와 함께 존립시킨 것 등으로 보아 우리는 왕유(王維)가 중국문학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으며 수묵의 산수화를 잘 그려 남종 문인화(南宗文人畵)의 시조(始祖)로 불린다.

왕유(王維)가15세 때 지은 <제우인운모장자〉라는 시가 실려 있어 그의 재능을 엿보게 한다.
그대 집의 병풍
뜰을 향해 펼치니
산천이 절로 전개되어
사람의 그림이 아니로구나.

王 維 왕 유의 逸話(일화)

당의 전성시대(盛唐時代성당시대)의 왕유(王維)는 미처 20세가 되기도 전에 시문이 유명해졌고 또 음악에도 정통하였으며 비파연주도 잘하여. 당시 장안에서 왕유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과 자주 왕래하며 가까이 지냈다.

그 때 장구고(張九皐)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역시 시문에 능하여 과거시험에 응시하고자 하였는데 권력이 있는 공주의 힘을 빌기로 작정하였고, 이에 공주는 장구고를 장원으로 급제시킬 것을 내용으로 하는 편지를 수석 시험관에게 띄우게 되었습니다. 왕유 역시 이때 과거를 준비하고 있던 터라 이 말을 듣고서는 공주의 측근이자 평소 알고 있던 기왕(岐王)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기왕은 왕유 편을 들고 싶었던지라 이렇게 말합니다.
“공주의 권세는 강대하니 그와 상대하여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꾀를 한가지 내었으니 당신이 지은 시 20수 정도를 복사해 오고 그 중 한 수를 비파곡으로 편곡하여 5일 후에 다시 오시오”
기왕이 말한 대로 준비한 후 왕유는 5일 후에 다시 기왕을 찾았습니다.
기왕은 다시 말합니다.

“당신이 공주를 배알하려면 내 말대로 해야 합니다. 얼굴에 화장을 좀 하시오”
이렇게 해서 왕유는 화장도 하고 화려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마치 악공인 것처럼 꾸며 악대의 맨 앞자리에 앉아서 공주가 나오는 연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맨 앞자리에 앉은 왕유는 나이가 젊고 풍모가 수려하여 즉시 공주의 눈에 띄게 되고 공주는 기왕에게 누구냐고 묻자 기왕은 자기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이어 왕유는 편곡한 비파곡을 연주하니 참석한 모든 이가 칭찬해 마지않았고 공주 또한 크게 기뻐했다.
이에 기왕이 이 사람은 비파뿐만이 아니라 시문에도 능하다 하니 공주가 그렇다면 시문을 가져와 보라고 하여 왕유는 가져온 시문을 공주에게 보입니다. 가져온 시문을 본 공주는 놀라 말하기를,
“아니, 이것은 내가 평소에 많이 보아온 훌륭한 시들인데, 옛날의 수작들을 당신이 지었다고 할 셈인가” 하고 말했다.

이에 기왕은 왕유더러 의복을 다시 평상복으로 단정히 갈아입게 하고 손님의 입장이 되어 다시 공주를 만나게 하니 그의 풍모는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탄복시켰다.
기왕은 아까 읽은 시들이 모두 왕유의 시임을 말하고.
“만약 이와 같은 인재를 급제시키게 되면 바로 국가의 영예가 될 것입니다. 듣자하니 공주님은 장구고를 염두에 두신다고 하지만 왕유 역시 장원으로 급제가 되지 아니하면 시험에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에 공주는 왕유에게 “장구고는 누가 부탁해서 그렇지, 나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다. 내가 직접 본 그대를 도와주겠다” 하고 말했다.
결국 왕유는 과거에 응시하고 공주의 도움을 받아 장원으로 급제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왕유가 비록 권력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가, 회화와 음악 방면 모두에 박학다식하였고 모두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특히 시가 방면에 있어서의 명성은 이태백(李太白)과 두보(杜甫)에 비길만 하였다.
왕유는 특히 산수풍경(山水風景)을 시로 표현하기를 잘하여 북송(北宋)시대의 시인 소동파(蘇東坡)는 그의 시를 일컬어 “詩中有畵 畵中有詩 (시중유화, 화중유시: 시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시가 있다)”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酌酒與裵迪 작주여배적- 王 維 왕 유 -

酌酒與君君自寬 人精蒜覆似波瀾
작주여군군자관 인정산복사파란

白首相知猶按劍 朱門先達笑彈冠
백수상지유안검 주문선달소탄관

草色全經細雨濕 花枝欲動春風寒
초색전경세우습 화지욕동춘풍한

世事浮雲何足問 不如高臥且加餐
세사부운하족문 불여고와차가찬

친구여 술이나 드시게.
인정은 물결같이 뒤집히는 것.
늙도록 사귄 벗도 칼을 겨누고,
성공한 이도 후배의 앞길을 막나니,
비에 젖어 잡풀은 우거져도
봄바람 차가와 꽃은 피지 못하거늘,
뜬구름 같은 세상 말을 해 무엇하랴.
누워서 배불리 지내는 게 제일이지

山居秋興 산거추흥 왕유

空山新雨後 天氣晩來秋
공산신우후 천기만내추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명월송간조 청천석상류

竹渲歸浣女 蓮動下漁舟
죽선귀완녀 연동하어주

隨意春芳歌 王孫自可留
수의춘방가 왕손자가류

빈산 비개인 후에 일기가 늦가을 되어네,
밝은 달은 솔 사이로 비추고, 시원한 물 돌 위로 흐르네.
대소리 요란한 것은, 빨래하는 처녀 돌아가기 때문이요,
연꽃이 움직이는 것은 고기잡이 배 내려가기 때문일세,
왕손이 남아 있어도 좋겠도다.

斷章단장

天寒遠山淨 日暮長江急
천한원산정 일모장강급

추운 하늘인데
먼 산 씻은듯 맑고
해 지자
강물 소리 더욱 잦이다.


送沈子福之江南 심자복을 강남으로 보내며

楊柳渡頭行客稀 罟師盪槳向臨圻
양유도두행객희 고사탕장향임기

唯有相思似春色 江南江北送春歸
유유상사사춘색 강남강북송춘귀

버들 우거진 나룻가엔 행인도 드문데
어부는 노 저어 한가히 포구로 간다
다만 못 잊는 정 봄빛처럼 한없는데
강남북으로 찾아온 봄을 보내는듯 하구나

雜詩 춘수 (春愁)

已見寒梅發 復聞啼鳥聲
이견한매발 부문제조성

愁心視春草 畏向玉階生
수심시춘초 외향옥계생

벌써 한매도 피어 나고
새 소리도 들려 오고
우거진 풀을 보면 더욱 시름겨워
층층계 덮으니 이렇게 슬플밖에

雜詠잡영

君自故鄕來 應知故鄕事
군자고향래 응지고향사

來日倚窓前 寒梅著花未
래일의창전 한매저화미

그대 고향에서 돌아왔거니
응당 고향 일을 알으렸다
올 무렵 우리집 창 옆엔
하마 매화꽃이나 피었던가

送別송별 왕유

下馬飮君酒 問君何所之
하마음군주 문군하소지

君言不得意 歸臥南山陲
군언불득의 귀와남산수

但去莫復問 白雲無盡時
단거막부문 백운무진시

말을 내려 그대여 술을 마시라
묻노니 그댄 어디로 가느뇨
그대 말하기를 뜻을 얻지 못하여
남산 기슭으로 돌아간다 하거니
다못 가라 다시 묻질랑 말아라
흰구름 항상 끝날 줄이 있으리.

九月九日憶山東兄弟 여수

讀在異鄕爲異客 每逢佳節倍思親
독재이향위이객 매봉가절배사친

遙知兄弟登高處 徧揷茱萸少一人
요지형제등고처 편삽수유소일인

홀로 타향에 외론 손 되어
명절이면 어버이 더 그리워라
형이랑 아우랑 같이 오르던 언덕에
수유를 꽂고 놀던 한사람이 줄었겠다.

臨高臺 별리

相送臨高臺 川原杳何極
상송임고대 천원묘하극

日暮飛鳥還 行人去不息
일모비조환 행인거부식

보내고 돌아서서 고대에 다다르니
산천은 끝닿은 델 알길 없어라
저문날 새들도 깃 찾아 오는데
떠난인 쉬어 가는 흔적도 없어.


辛夷塢 王維(신이오 목련 왕유 )

木末芙蓉花 山中發紅萼.
목말부용화 산중발홍악

澗戶寂無人 紛紛開且落.
간호적무인 분분개차락

나무 끝에 연꽃인 양 목련꽃이
산중에 붉게 피어 만발하였네.
시냇가 오막살이 비어 적적한데
목련꽃 어지럽게 피고 지네.

靑溪 청계 王維

言入黃花川,每逐靑溪水
언입황화천,매축청계수。

隨山將萬轉 趣途無百里
수산장만전 취도무백리

聲喧亂石中 色靜深松里
성훤난석중 색정심송리

漾漾泛菱荇 澄澄映葭葦
양양범릉행 징징영가위

我心素已閑 淸川澹如此
아심소이한 청천담여차

請留盤石上 垂釣將已矣
청류반석상 수조장이의

물어서 들어서길 황금빛 피는 냇가에 이르니
푸른 시냇물 앞 다투며 마냥 흐르네
산길을 따라 구르는 수레 만 번을 옮기니
이어진 길은 족히 백리가 아닌가 하더라.
바위 사이 흐르는 물 소리 요란하며
깨끗이 흐르는 물빛 깊은 솔 숲이로다
노란 연꽃 수초는 두둥실 떠 다니니
맑고 맑게 비치는 갈대와 같더라.
내 마음 바탕은 이미 평온해지고
맑은 물 깨끗이 넉넉함은 이 마음과 같구나
오래도록 바위 위 반석에 있기를 나 희망하니
따르기를 낚시질하며 이렇게 살으리랏다


춘계문답2(春桂問答2)봄 계수나무와 문답-王維(왕유)

問春桂 桃李正芳華
문춘계 도리정방화

年光隨處滿 何事獨無花
연광수처만 하사독무화

春桂答 春華詎能久
춘계답 춘화거능구

風霜搖落時 獨秀君知不
풍상요락시 독수군지불

봄 계수나무에게 묻기를 복숭아와 오얏나무 이제 막 향기로운 꽃 피워
봄빛이 곳곳에 가득하거늘 무슨 일로 홀로 꽃이 없소 하니
봄 계수나무 대답하기를 봄꽃이 어찌 오래갈 수 있으리
바람과 서리 몰아칠 때는 나 혼자 빼어난 줄 그대는 아는지 모르지

渭川田家 위천전가 /왕유(王維)

斜光照墟落 窮巷牛羊歸
사광조허락 궁항우양귀

野老念牧童 依仗候荊扉
야로념목동 의장후형비

雉雊夷苗秀 蠶眠桑葉稀
치구이묘수 잠면상엽희

田夫荷鋤至 相見語依依
전부하서지 상견어의의

卽此羨閑逸 悵然吟式微
즉차선한일 창연음식미

노을은 마을을 비추고,
외진 길로 소떼 양떼 돌아오네.  
목동을 기다리는 시골 늙은이  
지팡이 짚고 사립문에 서 있네.
장끼 울고 보리 이삭이 패고,
누에 잠이 들면 뽕잎은 줄어드네.
호미 메고 돌아가는 농부들
나누는 이야기 정답구나.
이런 한가로움 부럽구나.
쓸쓸히 ‘식미가’를 읊조린다

달(月) -왕유

獨坐幽篁裏 彈琴復長嘯
독좌유황리 탄금부장소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
심림인부지 명월래상조

그윽한 대나무숲 속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다가 다시 길게 휘파람을 불어본다.
갚은 숲속이라 사람들은 몰라도,
밝은 달이 찾아와 서로 비추어본다

죽리관(竹里館)-왕유(王維)

獨坐幽篁裏, 彈琴復長嘯
독좌유황리 탄금복장소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
심림인부지 명월내상조

나 홀로 그윽한 대숲에 앉아
거문고를 타다가 다시 길게 휘파람을 불어본다
숲이 깊어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밝은 달이 찾아와 서로를 비춘다.

자연이 주는 여유와 한가로움과 한없는 위로에 눈을 돌려 삶의 균형을 취하는 것이 중요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왕유는 시를 통하여 이러한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20여년의 관직 생활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의 자연을 노래한 시는 지난 삶에 대한 관조이며 성찰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왕유는 그의 세계를 고도로 절제된 언어로 회화성이 강하게 형상화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안서로 가는 원이를 보내다)-왕유(王維)

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위성조우읍경진 객사청청류색신

勸君更進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
권군갱진일배주 서출양관무고인

위성의 아침에 비 내리려 먼지를 적시고
푸르고 푸른 객사에 버들잎 새로워라
그대에게 권하여 또 한잔 술을 올리노니
서쪽으로 양관을 떠나면 옛 친구 아무도 없으리

왕유(王維)는 떠나는 친구가 서쪽으로 국경을 나가면, 당분간 친구가 없어 대단히 쓸쓸하고 외로울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왕유(王維)는 너가 새로운 곳에서 향수를 느끼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는 언제나 나를 생각하라. 나는 언제고 너의 변하지 않는 친구로 술처럼 따뜻하고 훈훈한 존재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뜻을 암시하고 있다.

황보악운계잡제오수1(皇甫岳雲溪雜題五首1)
황보악의 운계에 대한 잡영 다섯 수-왕유(王維)

鳥鳴磵(조명간) : 새 우는 골짜기

人閒桂花落 夜靜春山空
인한계화낙 야정춘산공

月出驚山鳥 時鳴春澗中
월출경산조 시명춘간중

사람 한가하고 계수나무꽃 떨어지고
밤시간 고요하고 봄산은 비어있구나.
달 떠자 산새들이 놀라고
때때로 봄 골짝 안에거 울어대는구나.

황보악운계잡제오수2(皇甫岳雲溪雜題五首2)-왕유(王維)
蓮花塢(련화오) : 연꽃 핀 언덕

日日採蓮去 洲長多暮歸
일일채련거 주장다모귀

弄篙莫濺水 畏濕紅蓮衣
농고막천수 외습홍련의

날마다 연꽃 따러가서는
모래톱이 길어 늘 저물어 온다네.
상앗대 놀려도 물 튀기지 말게나
붉은 연꽃에 옷 적실까 두렵다네.

황보악운계잡제오수3(皇甫岳雲溪雜題五首3)-왕유(王維)
鸕鶿堰(로자언) : 가마우지 나는 언덕

乍向紅蓮沒 復出淸浦颺
사향홍련몰 복출청포양

獨立何褵褷 銜魚古査上
독립하리시 함어고사상

잠깐 붉은 연꽃 향했다가 사라지고
다시 맑은 포구 나와서는 날아오른다
홀로 서니 깃털 어찌나 파르르 터는지
고목 뗏목 위에서 물고기를 물고 있다

황보악운계잡제오수5(皇甫岳雲溪雜題五首5)-왕유(王維)
萍池(평지) : 부평초 가득한 염못

春池深且廣 會待輕舟廻
춘지심차광 회대경주회

靡靡綠萍合 垂楊掃復開
미미녹평합 수양소복개

봄 연못은 깊고도 넓은데
때맞춰 가벼운 배 돌아오기 기다린다
느릿느릿 푸른 부평초 합쳐지고
늘어진 버들 쓸어가니 다시 물길 열린다

화자강(華子岡)화자의 언덕-왕유(王維)

飛鳥去不窮 連山復秋色
비조거부궁 연산복추색

上下華子岡 惆悵情何極
상하화자강 추창정하극

날아가는 새는 끝없이 날아 떠나고
연이은 산들은 또다시 가을빛이로다.
화자의 언덕을 오르내리노라니
서글퍼다, 이 마음이 어찌 하겠는가.

鳥鳴澗(조명간)

人閒桂花落 夜靜春山空
인한계화락 야정춘산공

月出驚山鳥 時鳴春潤中
월출경산조 시명춘윤중

사람이 한가하니 계수나무 꽃 떨어지고
밤이 고요하니 봄 산이 비었구나.
달이 솟으니 산새 놀라
때로 봄 시내에 울음 운다.

雜詩(잡시;왕유)
君自故鄕來 應知故鄕事
군자고향래 응지고향사

來日綺窓前 寒梅着花木
내일기창전 한매착화목

그대가 고향으로부터 왔으니
응당 고향의 일을 알 것이다.
오는 날 창 앞에 매화가 피었던가.
안 피었던가.

녹시(鹿柴) ; 사슴 울타리 왕유(王維)

空山不見人 但聞人語響
공산부견인 단문인어향

返景入深林 復照靑苔上
반경입심림 복조청태상

맑은 산 속 사람은 보이지 않고
두런두런 말소리만 들려 올 뿐
저녁볕은 깊은 숲에 스며들어
파란 이끼 위를 다시 비추고 있네.

인정(人情)/王維

酌酒與君君自寬 人情飜覆沙波瀾
작주여군군자관 인정번복사파란

白首相知儒按劍 草色全經細雨濕
백수상지유안검 초색전경세우습

花枝欲動春風寒 世事浮雲何足問
화지욕동춘풍한 세사부운하족문

不如高臥且加餐
불여고와차가찬

친구여, 술이나 좀 들려무나
인정은 물결같이 뒤집히는 것
흰 머리 되도록 사귄 벗도 칼을 겨누고위인도 후배의 전정을 막나니
보라, 비에 젖어 잡풀은 우거져도,
봄바람 차워 꽃은 못 핀다.
뜬구름 같은 세상일 말해 무엇하랴,
누워 배나 쓸며 지냄이 좋으리

이 시의 본래 제목은 "酌酒與裵迪(작주여배적)"으로서, 불우한 친구 배적에게 술을 권하며 위로하는 내용으로 된 7언 율시(七言律時)이다


過香積寺 향적사를 지나며-王維

不知香積寺 數里入雲峯
부지향적사 수리입운봉

古木無人徑 深山何處鍾
고목무인경 심산하처종

泉聲咽危石 日色冷靑松
천성열위석 일색냉청송

薄暮空潭曲 安禪制毒龍
박모공담곡 안선제독룡

구름 낀 봉우리로 몇 리를 들어갔네
고목은 우거져 사람 다닐 길도 없네
깊은 산 어디선가 종소리 들린다
샘물 소리는 높은 바위 틈에 흐느끼고
햇빛은 푸른 솔에 차갑기만 하다
땅거미 지는 빈 못 가에서
좌선으로 독룡을 억누르네.

渭城曲 王維
渭城朝雨浥輕塵,客舍靑靑柳色新。
위성조우읍경진,객사청청류색신。

勸君更盡一杯酒,西出陽關無故人。
권군갱진일배주,서출양관무고인。

위성 땅, 아침 비가 흙먼지를 적시니
여관집 둘레 푸른 버들 빛 더욱 산뜻해라.
그대에 권하노니 다시 한 잔의 술을 들라.
서쪽으로 양관 땅에 나가면 벗이 없느니라.

張繼:楓橋夜泊(장계:풍교야박)
月落烏啼霜滿天,江楓漁火對愁眠。
월낙오제상만천,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夜半鐘聲到客船。
고소성외한산사,야반종성도객선。

달은 지고 까마귀 우는 하늘엔 서리 가득한데
강촌교와 풍교 아래 어선들의 불빛이 수심에 찬 잠을 마주하는구나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객선으로 전해주네

(출처 : '왕유(王維)의 위성곡(渭城曲)과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
九月九日憶山東兄弟(구월구일억산동형제)구월 구일 산동의 형제들을 생각함
-王維(왕유)(唐)-하권p123

獨在異鄕爲異客 海逢佳節倍思親
독재이향위이객 매봉가절배사친

遙知兄弟登高處 遍押茱萸少一人
요지형제등고처 편삽수유소일인

홀로 타향땅에서 나그네 되어 있어
명절이 될 때마다 가족생각이 곱절 나네.
멀리 형제들은 높은 곳에 올라서
두루 수유를 꽂고는 한 사람이 적은 것을 알겠구나.

(출처 : '九月九日憶山東兄弟-王維(唐)' - 네이버 지식iN)

산거즉사(山居卽事)산에 살며 만나는 일-왕유(王維)

寂寞掩柴扉 蒼茫對落暉
적막엄시비 창망대낙휘

鶴巢松樹徧 人訪蓽門稀
학소송수편 인방필문희

嫩竹含新粉 紅蓮落故衣
눈죽함신분 홍련낙고의

渡頭燈火起 處處採菱歸
도두등화기 처처채능귀

적막감에 쌓여서 사립문 닫고
멀거니 지는 햇볕 마주 바라본다.
이곳저곳 학이 둥지 튼 소나무
찾아오는 사람 드물구나.
대나무 새순에 새 분말 쌓이고
붉은 연꽃에서 헌 잎이 떨어진다.
나룻머리에는 등불이 켜지고
이곳저곳에서 마름 따서 돌아온다.

춘중전원작(春中田園作)이월 봄날 전원에서-왕유(王維)

屋上春鳩鳴 邨邊杏花白
옥상춘구명 촌변행화백

持斧伐遠揚 荷鋤覘泉脈
지부벌원양 하서첨천맥

歸燕識故巢 舊人看新曆
귀연식고소 구인간신력

臨觴忽不御 惆悵遠行客
림상홀부어 추창원항객

지붕 위에 봄비둘기 울고
마을 주변에 살구꽃이 희다
도끼를 들고 높은 가지를 베고
가래를 메고 수맥을 찾아보노라
돌아온 제비는 옛둥지 알아보고
옛 친구는 새 달력을 보는구나
술잔을 보고도 갑자기 먹 못하고
먼 길 떠난 친구 생각에 서글퍼진다

五言古詩 王維

送綦毋潛落第還鄉 과거에 낙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모잠을 보내며

聖代無隱者, 英靈盡來歸
성대무은자, 영령진래귀

遂令東山客, 不得顧採薇
수령동산객, 불득고채미

既至金門遠, 孰云吾道非
기지금문원, 숙운오도비

江淮度寒食, 京洛縫春衣
강회도한식, 경락봉춘의

置酒長安道, 同心與我違
치주장안도, 동심여아위

行當浮桂棹, 未幾拂荊扉
행당부계도, 미기불형비

遠樹帶行客, 孤城當落暉
원수대행객, 고성당락휘

吾謀適不用, 勿謂知音稀
오모적불용, 물위지음희

태평성대에는 숨어 사는 이 없어,
뛰어난 인재들이 모두 모여드니,
마침내는 동산에 사는 그대 마저도
고사리 캐며 살지 못하게 하네.
그대 왔지만 금마문이 너무 멀었으니,
누가 우리의 이상이 잘못이라 말하겠는가?
과거 보러 오면서 강회에서 한식을 지냈고,
경락에서는 봄옷을 지었었지.
이제 나는 장안 길에서 술자리를 차리고,
그대는 나와 헤어지네.
그대는 곧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띄우고,
얼마되지 않아 그대 집에 닿겠지.
먼 곳의 나무들 나그네를 따르고,
쓸쓸한 성에는 지는 해 비추네.
우리들의 계획이 어쩌다 쓰이지 못하였을 뿐,
지음(知音)이 적다 말하지 말게나?

西施詠 서시(西施)를 읊음 五言古詩 王維

艷色天下重, 西施寧久微
염색천하중, 서시녕구미

朝為越溪女, 暮作吳宮妃
조위월계녀, 모작오궁비

賤日豈殊眾 貴來方悟稀
천일기수중 귀래방오희

邀人傅脂粉, 不自著羅衣
요인부지분, 불자저라의

君寵益嬌態, 君憐無是非
군총익교태, 군련무시비

當時浣紗伴, 莫得同車歸
당시완사반, 막득동차귀

持謝鄰家子, 效顰安可希
지사린가자, 효빈안가희

미인은 천하 사람들이 떠받으니,
서시인들 어찌 오래 미천한 곳에 있겠는가?
아침에는 월나라 시골처녀였다가,
저녁에는 오나라 왕비가 되었구나.
천할 때에는 남과 어찌 달랐으리오만,
귀하여지니 비로소 뛰어남을 알겠다.
사람을 모셔다 화장을 하게 하고,
자기 손으로는 비단옷을 입지 않는다.
임금이 총애할수록 더욱 교태를 부리고,
임금이 예뻐하니 옳고 그름이 없도다.
그때 비단 빨래을 함께 여자들은,
한 수레를 타고 돌아가지 못하였다.
이웃 여자들에게 이르노니,
어찌 얼굴 찡그림으로 총애 받기를 바라는가?


서시(西施 ?∼?,연대불명)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미녀. 땔나무 장수의 딸이었는데,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範려)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西施)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였다. 이름은 이광(夷光) 천생이 아름다운 피부를 가졌다.

월(越)나라의 빼어난 미녀인 서시(西施)를 선시(先施) 또는 서자(西子)라고도 하였데, 영라산(녕蘿山; 지금의 절강성 제기현) 기슭에 있는 한 가난한 집의 딸이었다. 영라산 아래에는 완강(浣江)이라는 강이 있었다. 서시는 부지런해서 항상 산에 올라 나무를 하고, 내려와서는 강에서 빨래를 하였다.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아름다운 서시를 퍽 좋아하였다. 그런데 서시는 가난한 집안 살림에다, 오래 동안 해온 힘든 일 때문에 위장병을 얻게 되었는데, 위통(胃痛)이 일단 발작하면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고 배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그녀가 더 예뻐 보이려고 그렇게 하는 것으로 여기고, 다투어 그녀를 칭찬하였다. 이 일을 알게 된 추녀인 동시(東施)라는 처녀가 서시의 흉내를 내기 시작하였으니, 이를 보아야 했던 마을 사람들은 괴롭기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후에, 서시는 월왕(越王) 구천(勾踐)의 비(妃)가 되지만, 월나라가 오(吳)나라에 의해 패배하자 월왕 구천은 오나라로 잡혀갔다. 이에 서시는 월왕과 월나라를 구하기 위해 오왕 부차(夫差)의 비(妃)로 가게 된다.

서시(西施)가 가슴을 앓아 눈을 찡그리고 있었는데, 그 마을의 추녀(醜女)가 이를 보고 아름답다고 여기고, 집으로 돌아와서 역시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찡그렸다네. 마을의 부자가 그를 보고는 문을 잠근 채 밖에 나오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은 처자식을 데리고 아예 그 마을을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이태백의 오서곡이란 시에서 서시(西施)를 다음과 같이 표현 했다.

烏棲曲(오서곡)

姑蘇臺上烏棲時 吳王宮裏醉西施
고소대상오서시 오왕궁리취서시

吳歌楚舞歡未畢 靑山猶銜半邊日
오가초무환미필 청산유함반변일

銀箭金壺漏水多 起看秋月墜江波
은전김호누수다 기간추월추강파

東方漸高奈樂何
동방점고내악하

고소대 위에 까마귀 깃들이려 할 적
부차는 궁중에서 서시에 흠뻑 취했었네.
오가 초무의 환락 끝나지 않았는데
푸른 산은 어느 덧 지는 해를 반쯤 삼켰었네.
은 바늘 세운 금 항아리에선 물 많이 새었고
일어나 바라보면 가을 달 물결 속에 빠져 있었네.
동녘 어느새 밝아 왔으니 못 다한 즐거움 어이 했을까

침어(浸魚) - 서시(西施)

중국 사대 미인 중 한사람인 서시(西施) 는 빼어난 미인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출중했던지 머리가 아파 찡그린 모습조차 아름답게 보였다. 같은 마을 사는 처녀들이 서시(西施)의 찡그린 모습을 보고 자신도 찡그린 얼굴이 아름답게 보일 것 같아 마을 처녀들이 모두 찡그리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시(西施)는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었다.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시(西施)는 침어(浸魚)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서시(西施)와 범려(範黎)

춘추 말엽,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오(吳)나라를 공격하였지만 크게 패하였으나, 그는 범려(範黎)를 재상으로 임용하고 이른바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범려(範黎)는 구천(勾踐)에게 한 가지 방책을 내놓았다.
"오나라를 쳐부수기 위해서는, 일단 금은보화와 미녀로 오왕을 유혹하며, 내부적으로는 정예병을 훈련시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천은 범려(範黎)의 의견에 곧 그로 하여금 미인들은 찾아보게 하였다.
범려(範黎)는 여러 차례 수소문한 끝에 완사계(浣沙溪)라는 곳에 이광(夷光 西施)이라는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광(夷光)의 어머니는 명주(明珠)를 몸에 맞고 임신하였다가 빛이 찬란한 새가 품에 들어오자 그녀를 낳았다고 하였다.
범려(範黎)는 곧 배를 타고 완사계(浣沙溪)에 도착한 범려는, 채 바위에 기대어 앉아 얼굴을 찡그리며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는 홍안소복(紅顔素服)의 여자를 발견하였다. 옆에는 흰 비단이 담긴 바구니가 있었다. 범려(範黎)는 그 여자에게 물었다.
"낭자께서는 무슨 일로 그리 걱정을 하시는거요?"
홍안소복(紅顔素服)의 여자는 잘 생긴 사나이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읊조렸다.
"사람들은 봄빛 새롭다하지만, 삼년 봄은 보이지 않고, 맑은 물 넘실거리지만, 나라 잃은 한(恨) 씻을 길 없네"
범려(範黎)는 깜짝 놀라 한참동안 말을 잃었다.
범려(範黎)는 몇 차례 알아보고, 그 여자가 이광(夷光 西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튿날, 범려는 의관을 갖추고 그녀를 찾아가 마을 앞에 이르렀을 때, 이광(夷光 西施) 작은 돌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감고 있었다. 범려가 가까이 가보니, 이광(夷光 西施)의 옆에는 연지나 화장분도 향유나 입술 바르는 기름도 없었으며, 푸른 나뭇잎이 떠 있는 맑은 물 한 그릇만 놓여있을 뿐이었다. 범려(範黎)는 본시 시골에서 자란 사람인지라, 그 나뭇잎이 어떤 나무의 것인지 곧 알아차리고 물었다.
"낭자께서는 아침에는 비단(沙)을 빨고(浣), 저녁에는 비단을 짜면서도, 어찌 나뭇잎 띄운 물만으로 머리를 감는다는 말씀입니까?"
이광(夷光 西施)은 그가 전날 보았던 그 사나이라는 것을 알고, 가볍게 웃으며 이렇게 읊었다.
"밤마다 금실 꼬아 비단을 짜지만 모두 공물로 받치니.
가련하도다, 완사 사람들, 등불 밝힐 기름 살 돈조차 없으니."
범려(範黎)는 다시 한번 놀라며 생각하였다.
"이 여인이 나라와 백성들을 이처럼 생각하다니, 우리 월나라의 희망이로다."
범려(範黎)는 이광(夷光 西施)에게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고 함께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는데 나서자고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사흘째 되던 날, 범려(範黎)는 월왕이 하사한 인부(印符)를 차고, 이광(夷光 西施)을 찾아갔다. 때가 마침 청명절이라, 월나라의 고풍대로 집집마다 규수들이 모두 짝을 지어 놀이를 나왔다. 나라는 비록 존망의 위기에 처하여 있었지만, 완사계(浣沙溪) 언덕에서 답청(踏靑)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범려(範黎)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이광(夷光)을 찾다가, 문득 깨진 바위 아래에 어떤 여자가 있는 것을 멀리서 보게 되었다. 범려(範黎)는 가까이 가보았다. 범려(範黎)는, 그 여자가 바로 이광(夷光)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았다. 이광(夷光)은 머리에 흰 비단을 두른 채,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범려(範黎)가 물었다.
"낭자, 청명가절 이 즐거운 날, 이런 차림을 하고 울고 계시다니, 집안에 슬픈 일이라도 있는지요?"
이광(夷光)은 울먹이며 이런 시를 읊었다.
"남편이 죽은 것도, 부모가 돌아가신 것도 아니오.
다만 나라가 망했던 날을 생각하니, 슬픈 마음 의지할 곳이 없을 뿐이오."
범려(範黎)는 이 말을 듣자마자, 크게 놀라며, 손을 꼽아 헤아려 보았다. 바로 3년전 월나라가 망했던 날이었다. 범려(範黎)는, 이광(夷光)이 나라의 멸망을 슬퍼하는 우국의 정이 조정의 대신들보다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범려(範黎)는 인부를 내보이며, 자신의 뜻을 박혔다. 이광(夷光)은 인부를 보더니, 그 사나이가 월나라의 현신(賢臣) 범려(範黎)라는 것을 알고, 기꺼이 그의 계획에 따르기로 하였다. 이광(夷光)은 서시(西施)의 어릴 적 이름이었다.

중국엔 서시(西施) 같은 美女을 형용한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沈魚落雁, 閉月羞花,
침어락안, 폐월수화,

물고기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기러기는 땅밑으로 떨어지며,
달은 구름뒤로 얼굴을 가리고,
꽃은 스스로 부끄러워 하노라


서시빈목(西施矉目)고사 성어는
[동의어] 서시봉심(西施捧心), 서시효빈(西施效矉).
[출전]《莊子》〈天運篇〉

서시(西施)가 눈살을 찌푸린다는 뜻. 곧 ① 영문도 모르고 남의 흉내를 냄의 비유, ② 남의 단점을 장점인 줄 알고 본뜸의 비유.
춘추 시대 말엽, 오(吳)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절세의 미인 서시(西施)를 바쳤다. 그러나 서시는 가슴앓이로 말미암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는 길을 걸을 때 가슴의 통증 때문에 늘 눈살을 찌푸리고 걸었다. 이것을 본 그 마을의 추녀(醜女)가 자기도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면 예쁘게 보일 것으로 믿고 서시의 흉내를 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질겁을 해서 집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한다.

춘추 시대 말엽의 난세(亂世)에 태어난 공자가 그 옛날 주왕조(周王朝)의 이상 정치(理想政治)를 그대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재현시키려는 것은 마치 '서시빈목(西施矉目)'을 흉내 내는 추녀의 행동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태백은 오서곡(烏棲曲)이란 시에서 서시(西施)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姑蘇臺上烏棲時 吳王宮裏醉西施
고소대상오서시 오왕궁리취서시

吳歌楚舞歡未畢 靑山猶銜半邊日
오가초무환미필 청산유함반변일

銀箭金壺漏水多 起看秋月墜江波
은전김호누수다 기간추월추강파

東方漸高奈樂何
동방점고내악하

고소대 위에 까마귀 깃들이려 할 적
부차는 궁중에서 서시에 흠뻑 취했었네.
오가 초무의 환락 끝나지 않았는데
푸른 산은 어느 덧 지는 해를 반쯤 삼켰었네.
은 바늘 세운 금 항아리에선 물 많이 새었고
일어나 바라보면 가을 달 물결 속에 빠져 있었네.
동녘 어느새 밝아 왔으니 못 다한 즐거움 어이 했을까

서시(西施)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월(越)나라의 저라산(苧蘿山) 기슭(지금의 절강 제기시) 의 한 농촌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광(夷光)이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곱고 용모가 아름다워 항상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루는 서시(西施)가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맑은 강물에 비쳤다. 이때 물고기가 물에 비친 아름다운 서시(西施) 모습에 도취되어 헤엄치는 것도 잊어버리고 구경하다가 점점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서시(西施)를 '침어(沈魚: 미모가 너무나 아름다워 그것을 감상하던 물고기를 강 밑으로 가라앉게 했다)'라고 하게 되었다. 또 ≪장자≫에도 그녀의 미모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서시(西施)가 마음속의 근심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리며 마을을 걷고 있었다. 이마를 찌푸려도 여전히 아름다운 서시(西施)의 모습을 보고, 이 마을의 추녀가 자기도 서시(西施)처럼 하면 아름다워 보일까 하여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걸어갔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 추녀의 모습을 보고 모두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는 황급히 집으로 들어가 대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후기 제후들의 쟁패의 중심은 장강(長江) 유역 하류와 절강 지역으로 옮겨진다. 이에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던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된다. 월(越)나라는 하(夏)나라 우(禹)임금의 후손이고, 오(吳)나라는 주(周)왕실의 속국이었다.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통치시기에 오나라는 초(楚)나라에서 귀순한 대신 오자서(伍子胥)와 유명한 병법가 손무(孫武)의 보좌로 국력이 강성해졌다. 이에 초나라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승리를 눈앞에 둔 순간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주(周) 경왕(敬王) 24년 구천(勾踐)이 월나라 왕에 즉위했다. 오왕 합려는 이때를 틈타 월나라를 공격하여 지난날의 원한을 갚고자 했다. 오왕이 된 부차는 부왕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맹장 오자서(고사성어 日暮途遠(일모도원) 참조)와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孫武)의 도움과 '섶 위에서 잠을 자고[와신(臥薪)]'하는 등 절치부심으로 결국 월왕(越王) 구천(勾踐)에게 복수를 하였다. 전쟁에 진 월나라 왕 구천(勾踐)은 부차에게 항복하고 항상 곁에다 쓸개를 놔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상담(嘗膽)] 일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군사력을 키우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고사성어 臥薪嘗膽(와신상담)이 과정에서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나라 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範黎)가 보복을 위해 월나라 최고 미인인 서시(西施)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즉, 전쟁에 패한 월 구천이 승자인 오 부차에게 준 여인이 바로 서시(西施)이다. 서시(西施)의 출생 및 사망 연도는 기록에 없다. 하지만 두 나라의 전쟁 중에 있었던 사실이니 대략 기원전 500년 정도에 출생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녀는 땔나무 장수의 딸이었고 선천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서시(西施)는 가슴앓이 병이 있었는데 가끔씩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매우 아름다웠지만 눈살을 찌푸릴 때 더욱 아름다워 추녀들로 서시(西施)의 행동을 모방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고사성어 서시빈목(西施빈目) 참조) 결국 미인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은 부차는 구천에게 패하게 되었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전쟁 중에 모국인 월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서시(西施)는 적국 군왕 부차(夫差)를 유혹하기 위한 정치적 임무를 지고 부차의 애첩이 되어 그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인계의 주인공이 된다.
구천은 부차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매년 많은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예물로 바쳤는데, 서시(西施)도 그러한 목적으로 오왕 부차에게 바쳐진 미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때 월나라 대부 범려는 여러 차례 오나라에 미녀를 선사하였음에도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직접 전국 각지를 돌면서 절색의 미녀를 찾아 나섰다. 하루는 범려(範黎가 저라산(苧蘿山) 기슭에 이르렀는데, 약야계(若耶溪)라고 하는 곳에 두 명의 미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두 미녀는 바로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이었다. 범려(範黎)는 그녀들의 자태를 보자마자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더 다듬는다면 세상에 보기드는 보물이 되어 반드시 오왕 부차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월나라의 미래는 저 여인들에게 달려 있도다!". 범려(範黎)는 그녀들을 만난 다음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그가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은 무릎을 꿇어 절을 올리고, 연약한 시골 여자의 몸으로 이렇게 중요한 국가의 대사를 맡게 될 줄 몰랐다면서,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을 다짐한다. 이에 범려(範黎)는 회계산 부근에 비밀 장소를 마련하여 미인계를 성공시킬 계책을 체계적으로 준비해나갔다. 여기에는 서시(西施)와 정단(鄭旦)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미녀 10여명이 더 있었는데, 교육 내용은 먼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상교육을 실시한 후, 그 다음으로 일반적인 지식을 전수하였다. 특히 가무(歌舞), 몸가짐, 예절과 사람을 유혹하는 기교 등을 중점적으로 지도하였으며, 정보수집 지식과 기술도 필수과목이었다. 이러한 집중적인 교육을 통하여 단기간에 그녀들은 충성심과 고귀한 품성을 갖춘 공작요원으로 양성되었다. 현대적 의미로 말한다면 서시(西施)는 바로 유명한 여자 스파이였던 것이다.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은 많은 스승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발군의 재능을 나타내어, 3년만에 가무를 배우고 우아한 자태와 교태로운 정취를 뽐낼 수 있게 되었다. 월왕 구천은 이들을 시험한 후 대단히 만족하였다. 이에 범려는 날을 잡아 서시(西施)와 정단(鄭旦) 등을 데리고 오나라로 향하였다. 그런데 어느새 범려(範黎)는 서시(西施)와 사랑에 빠져 버렸고 서시(西施)도 임신을 한 몸인지라, 두 사람은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니 어떻게 이 배부른 미인을 오왕에게 바칠 수 있었겠는가? 오나라로 가는 도중에 가흥(嘉興)이라는 지방에 이르러 범려는 서시(西施)가 풍토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반 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여기에서 서시(西施)는 범려(範黎)의 아이를 낳았으나, 가련하게도 이 어린 생명은 부모에게 선택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범려(範黎)와 서시(西施)는 국난으로 만났다가 국난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부차에게 바쳐진 후 부차는 서시(西施)의 미모를 한없이 사랑하였다. 서시(西施)는 자신의 신분을 교묘하게 숨겼으며, 부차는 그러한 서시(西施)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부차는 서시(西施)를 위하여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영암산(靈巖山)에 화려한 관와궁(館娃宮)을 짓고 온갖 보석으로 호화롭게 장식하였다. 또 온갖 궁리 끝에 땅을 파서 큰 옹기를 묻어 평평하게 한 후 그 위를 다시 두꺼운 나무로 덮은 회랑을 만들게 하여 그것을 '향리랑(響履廊)'이라 하였다. 서시(西施)가 이 향리랑 위를 걸어 갈 때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영롱하게 울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공호수를 조성하여 그 주위에 아름다운 화초를 심고 호수 안에서 배를 띄워 함께 놀 수 있도록 하였다. 서시(西施)와 정단의 갖은 애교는 부차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으며, 이로써 부차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그녀들과 함께 가무와 산수를 즐기는 데만 열중하였다. 결국 부차는 범려(範黎)의 계획대로 역대 망국의 군주들이 걸었던 길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었다. 월왕 구천은 경거망동을 하지 않고 복수의 날만 기다리면서, 오나라가 대외 원정을 떠나 군사력을 소진 한 후에 오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마침 서시(西施)로부터 오나라가 제(齊)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구천은 그때를 틈타 병력을 파견하여 오나라를 도우는 척 하면서 오왕 부차의 환심을 사 두었다. 그 결과 오나라는 제나라 정벌에 성공하였으나, 오나라 상국(相國) 오자서는 월나라마저 파멸시켜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월나라에서도 이러한 오자서가 그들의 계획을 성사시키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월나라에서는 이 오자서(伍子胥)를 없앨 궁리를 하였다. 오자서의 제거 계획이 마련되자 그것은 서시(西施)의 임무가 되었다. 서시(西施)는 갖은 교태를 부리며 오왕 부차에게 오자서(伍子胥)에 대한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부차는 서시(西施)의 말에 속아 오자서의 충정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월나라 문제에 대한 토론 중에 의견 충돌이 일어나자 부차는 오자서(伍子胥)에게 자살할 것을 명했다. 비분한 오자서(伍子胥)는 두 손으로 자기의 두 눈을 파낸 다음, 부하에게 명하여 그가 죽은 후에 월나라 군대가 오나라 성을 쳐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도록 그것을 성문밖에 걸어두라고 말했다. 이에 크게 노한 부차는 그를 잔인하게 찢어 가죽 주머니에 싸서 바다에 버리도록 했다. 오자서가 죽은 후 백비가 정사를 맡음으로써 오나라는 패망의 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주(周) 경왕(敬王) 38년 가을, 오왕(吳王) 부차는 제후들의 패자를 결정짓는 황지(黃池)의 회맹에 참가하기 위하여 직접 오(吳)나라의 정예 병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떠났다. 이에 오(吳)나라의 도성은 텅 비게 되었으며, 구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吳)나라의 도성을 공격해 들어가 오나라 태자를 고소대(姑蘇臺)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4년 후 오(吳)나라에는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기근에 시달렸다. 이때 구천은 다시 오(吳)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오(吳)나라 군대는 성을 지키기에만 급급하여 반격할 틈도 없었다. 주(周) 원왕(元王) 2년, 월왕(越王) 구천은 수군을 동원하여 오(吳)나라를 다시 공격하였다. 2년여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결국 오(吳)나라 성은 무너지고 부차는 고소산(姑蘇山)으로 도망가 자결하였다. 그 후 서시(西施)의 행방에 대해서는 전설적으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오(吳)나라가 멸망되는 날 범려(範黎)는 고소대(姑蘇臺) 아래에서 옛날의 애인 서시(西施)를 찾아 황급히 태호(太湖)로 도망가서 그녀와 함께 배를 타고 아득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범려(範黎)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부귀영화를 버리고 이름을 숨긴 채 오호(五湖)를 유랑하면서 세상사를 잊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산동(山東)에 도주공(陶朱公)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부(巨富)가 나타났는데, 그의 아내는 꽃처럼 아름다웠으며 부부의 금슬도 아주 좋았다. 이 도주공이 바로 범려(範黎)이고 그의 아내는 월(越)나라의 미인 서시(西施)였던 것이다.

서시(西施)를 일컫는 묘사
日暮途遠 (일모도원)해는 저물고 길은 멀다는 말로,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음을 뜻 한다
唐突西施 (당돌서시)당돌한 서시라는 뜻으로, 꺼리거나 어려워함이 없이 올차고 다부진 서시라는 뜻
東西效矉(동서효빈)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어 창피한 꼴을 보인다.

ꋮ왕유 [王維, 699?~759]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원종(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