陶山月夜詠梅 /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
獨倚山窓夜色寒 /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 /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自有淸香滿院間 /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梅邊行遶幾回巡 /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夜深坐久渾忘起 /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香滿衣巾影滿身 /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
▲ 도산서원 매화나무 / 사진은 작년 봄 안동시에서 제공한 사진임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매화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 "내 평생 즐겨함이 많지만
매화를 혹독하리 만큼 사랑한다"고 『매화시첩(梅花詩帖)』에 적었다.
조정에 나아가 국사를 처리하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매화와 문답으로 풀어 나갔고,
눈 내리는 겨울 밤 홀로, 분매(盆梅)와 마주 앉아 술상을 가운데 놓고
“매형 한잔 나 한잔!” 하며 밤을 지새워 시정(詩情)에 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前身應是明月 /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幾生修到梅花 /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이 시에서도 퇴계선생이 매화를 얼마나 끔찍히 여겼는지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한편 퇴계선생이 단양군수 시절 두향(杜香)이라는 관기(官妓)와 만난 이야기가 있다.
40대 후반의 고을 사또와 10대 후반의 관기의 만남,
그 시절 50을 눈앞에 둔 나이라면 손주 몇이나 볼 중늙은이 이건만
믿기 어려우나 두향은 첫눈에 선생에게 반하였다고 한다.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뻣뻣했던 선생은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던 선생은 빈 가슴에
비록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관기이지만 시(詩)와 서(書)와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하여 한떨기 설중매(雪中梅) 같은 두향을 결국 받아 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겨우 9개월 만에 선생이 풍기군수로 옮겨 가면서 끝났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움 뿐이다.” 선생이 무겁게 입을 열자
두향이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써 나갔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제
어느듯 술 다 하고 님 마져 가는 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후 두 사람은 선생이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매화 화분이 들어 있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평생 이 매분(梅盆)을 가까이 두고 두향을 보듯 애지중지 사랑을 쏟았다.
위 사진의 매화나무가 두향이가 준 매화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으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말년에 도산서당(陶山書堂)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선생이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지자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며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선생의 마지막 한 마디는 「매화에 물 주어라.」였다고 한다.
선생의 그 말속에는 선생의 가슴에도 두향이가 항상 자리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대단한 절제력이다.
한편, 선생을 떠나 보낸 뒤 두향은 간곡한 청으로 관기(官妓)에서 풀려나와
선생과 자주 갔었던 남한강 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다.
퇴계 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안동까지 4일간을 걸어 영전을 찾아 예를 올리고
단양으로 돌아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하니
심히 애달픈 사연이 아닐수 없다.